은혜의 나눔

[스크랩] [교회사 인물] / 어거스틴

주님의 일꾼 2017. 7. 19. 13:06

 

 

[교회사 인물]

/ 어거스틴

 

 

◆ 영어로는 어거스틴(Augustin), 라틴어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라고 불리는 히포 교회의 감독은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초대 기독교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철학자요 사상가이자 목회자라 일컬어진다.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은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케 한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어거스틴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최고의 신학자요 사상가로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 개신교에서는 신약성경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사이의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들은 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의 골격으로 사용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아직도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신학 사상들이 어거스틴에게서 출발된 것들이다.

 

◆ 어거스틴은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북아프리카 소도시 다가스테에서 AD354년 태어났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어릴적 예수님의 이야기와 복음에 대해 들었으나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고향과 인근 도시 마다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370년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아버지는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에 뛰어났던 어거스틴에게 수사학을 제대로 배우게 하기 위해 열 여섯의 어거스틴을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 보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거스틴은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있지 않아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었다. 떳떳하지 않은 이 동거 생활은 이후 1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어거스틴은 아들을 몹시 귀하게 여겼는데, 이 아들은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 어거스틴 품안에서 살았다.

 

열여덟 살 무렵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저서를 읽고서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제 세상 것들에 대한 애정은 시들해지고,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철학적 관심으로 성경도 읽어보았지만, 그 문체나 내용이 유치하게 느껴졌기에 금세 덮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기와 같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오히려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를 지지하며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다.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과 절교를 선언한다.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했던 어거스틴은 3년만에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고향 다가스테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으나 그 이듬해에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 아홉 해 동안 어거스틴은 마니교 이단에 기웃거렸지만, 결국 마니교의 어설픈 교리 체계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그리하여 28세경 낙심한 어거스틴은 연인과 아들을 데리고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그는 한동안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 황실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다(384년). 이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14년동안 동거해온 여인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어떻게 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축사를 멋지게 꾸밀 수 있을까 고심하며 밀라노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마침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순간 어거스틴은 자신이 이토록 고달프게 추구하고 있는 인생의 행복이란 것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어쩌면 지금 거지가 이미 맛보고 있는 작은 행복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노에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성직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감독으로 있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를 소개받고서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가, 그의 논리적이고도 확신감 넘치는 설교를 통해 성경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쳐 갔다. 게다가, 황실의 고위직 폰티치아누스가 들려준 수도승 안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다. 복음의 권고대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나선 수도승들의 삶에 비해, 아직도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삶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갈등 가운데 괴로워서 밀라노의 한 정원 무화과나무 밑에 홀로 주저앉아 비통한 심정으로 ‘언제까지, 언제까지입니까? 내일, 또 내일이옵니까? 지금은 왜 아닙니까? 어찌하여 제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습니까?’라고 울부짖고 있을 때, 갑자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어린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신약성경 로마서를 펼쳐 읽었는데, 그 본문이 바로 로마서13:13,14절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한 말씀 앞에 그는 꼬꾸라졌고,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심령을 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386년).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에 눈뜬 어거스틴은 이렇게 노래했다.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어거스틴은 387년 부활절 밤, 밀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으며, 어머니 모니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아데오다투스,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밀라노를 떠나 채 고향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고향 다가스테에 돌아온 어거스틴은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88년). 그리고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면서 단식과 기도와 선행에 전념했다(388~391년).

 

어거스틴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그는 온전히 수도생활에만 매달리고 싶어 혹시라도 교회의 공직을 맡게 될까봐 늘 조심했다. 그러다 한 번은 북아프리카 제2의 도시 히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연로한 발레리우스가 감독으로 있었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발레리우스 감독은 자기를 도와줄 사제가 당장 필요하다고 강론 중에 하소연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어거스틴이 있었다. 이때 예배당에서 어거스틴을 알아본 신자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몰려들었다. 어거스틴을 발레리우스 감독 앞에 억지로 데려간 그들은 어거스틴에게 사제 서품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어거스틴은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들인 어거스틴은 서른 일곱의 나이에 늦깎이 사제가 되었다(391년).

 

그는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감독의 허락을 얻어 교회 옆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의 허구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다. 특히 구원은 신의 힘만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보태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이같은 어거스틴의 신학적 성취는 이후 종교개혁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랑과 겸손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수도 생활과 사제 생활을 함께 하던 어거스틴은 395년 발레리우스 감독이 노쇠하자 그의 공동 감독으로 선출되어 4년동안 감독을 보좌하다가, 발레리우스의 뒤를 이어 히포의 감독이 되어(397년) 평생 동안 히포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목회하였다.

 

참된 목회자이며 탁월한 사상가로서, 모든 교부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어거스틴의 복음적인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을 줄을 몰랐다. 병이 깊어져 이 세상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는 다윗의 참회 시편 일부를 옮겨 적어 벽에 붙이게 하고는, 침대에 누운 채 날마다 그것을 되새기고 읽었으며,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40년 가까이 히포교회의 감독으로 교회를 섬긴 어거스틴은 AD430년 8월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 피난민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3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쓴 책은 무려 117권. 어거스틴을 흠모했던 그의 제자 이시도레는 “그의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거스틴은 신학의 주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국가론, 사회와 정치, 역사 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어 현대사회에 제기된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을 다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중세 1000년은 물론 종교개혁을 거쳐 근·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실 모든 신학적 주장은 어거스틴을 기준으로 그에게서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에 의지해 로마가톨릭은 물론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도 싸웠다. 어거스틴은 루터 이전의 루터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프로이트보다 먼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했고, 주지주의에 대항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이끌고가는 본능(Libido)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다.

 

◆ 그는 끊임없이 마니교나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이단과 논쟁을 벌였지만 그가 이룩한 신학적 특징은 논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였다. 어거스틴은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마지막 인생을 살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복되게 사는 것은 단지 오성(이성)에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에 따른 삶일 것이다. 복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된 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에,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에, 우리 성도님들의 직장에, 여러분의 앞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천사가 해석한 성경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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