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나눔

원종수 권사 신앙간증

주님의 일꾼 2019. 1. 17. 18:39

원종수 권사 신앙간증

원종수 박사는 미국 볼티모아 감리교회 권사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전국 의사고시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며, 현재 오쿠우드병원 암전문의로서 목회학박사학위 과정에 있다.


암을 초토화시키는 핵무기-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


나는 충남 연기군 어머니 외가에서 1951년 2월 8일 출생했다.6.25 전란의 포성이 전국을 뒤덮던 혼란 중이었다. 위로 누님이 세 분 있었기에 아들인 나에 대한 집안 식구들의 관심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이 군장교로 전선을 따라다녀야 했으니 우리가족은 어머니와 거의 지냈다. 어머니는 저녁마다 우리들을 모아놓고 가정예배를 드렸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전선이 가라앉으면서 우리 가족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성남감리교회 속장으로 교회봉사에 적극적이셨는데 아버님이 이런 어머니를 못마땅해 하시는 바람에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

1954년 아버님이 전역한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직업을 찾지 못하셨던 아버님은 새로운 일을 찾아 서울로 떠나셨고, 어머님은 삯바느질과 가축 키우는 일로 부업을 하셨다.

내가 4살 때 어머님이 나를 위해 내내 기도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무렵은 모두가 구호미로 끼니를 채울 때였는데 옆집에서 밀밥을 보내와 누나들과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다. 그런데 헛배가 차오르면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민간요법을 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어렵게 병원을 찾았다.

“장이 꼬였습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니 수술비를 마련해 오세요.” 의사의 벼락같은 진단에 어머니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4살짜리 아들의 몸에 칼을 대면 목숨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나를 들쳐 업고 병원을 돌며 기도했다.

“하나님 종수를 살려주세요. 이 애를 살려주시면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만들겠습니다. 제말 목숨만 살려 주세요.” 어머니의 이 간절한 서원기도는 결국 내가 수술을 받지 않고도 병상에서 일어나게 했다. 어머니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 나를 위해 기도드렸다.

이 때문에 한때 나는 미국에 가서도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어머니의 이 말씀이 내 신앙의 골격이 되지 않았나 여겨진다.

전교 석차 3백 50등이 서울대 의대합격

성경을 읽으며 신앙에 몰입했던 나는 거의 매일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했다. 고등학생이면 한창 공부하고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데도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이 즐겁고 기뻤다. 1967년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비몽사몽간에 분명하고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종수야, 종수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깜짝 놀랐다. 정신이 멍한 가운데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하나님께 돈을 달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주일학교에서 배운 솔로몬의 지혜가 떠올라 지혜를 달라고 말씀드렸다.

당시 나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신체적인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응답 주신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후였다. 새벽기도를 다녀와 로마서 16장까지 두 번을 읽은 후 그 말씀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계속 읽고 싶었으나 학교 갈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다. 성남동에서 대흥동까지 버스비가 없어 걸어가는 동안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거리의 간판을 쳐다보면 그 간판들이 아까 본 로마서의 성경으로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몸이 허약해 어지럼증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여겼다. 병원에 가야 할지 고민도 했다. 그 무렵 나의 학교성적은 동급생 4백 80명 중 3백 50등 정도였다. 매일 철야예배에 새벽기도를 다닌 데다 밴드부를 한답시고 시간을 빼앗겼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병치레도 잦았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네가 성적이 이게 뭐니.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담임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은 나는 이때부터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심히 공부한 뒤 첫 시험을 보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셨다. 지난번 로마서가 선명하게 들여다보이던 것처럼 내가 공부했던 책이며 노트필기가 고스란히 뇌리에 떠올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전교 5등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담임선생님과 동급생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그로부터 공부에 재미가 붙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나는 전교 1등으로 졸업을 했으며 서울대 의대에 지원, 합격했다.

공부하기 전 반드시 성경 읽고 기도

서울대 3학년 때는 의대기독학생회장을 맡아 무의촌진료와 봉사활동을 했다. 나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누구를 돕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정말 흐뭇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찬송을 인도하고 설교도 했다.

학교성적은 늘 상위였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약간 특이하다. 공부하기 전 성경을 한 장 읽어 마음을 가다듬은 뒤 기도를 하고 공부를 시작한다.

“하나님, 제가 지금 공부하는 이 과목이 머리에서 지식이 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게 하옵소서. 이 공부가 나의 인간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이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뒤 공부하면 피곤도 잊고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기도에 간 적도 많았다. 새벽이슬을 맞고 찬송을 부르며 집을 향하는 그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1975년 2월, 서울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전국의사 국가고시에서도 1등을 했다. 나는 이것이 분명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루어졌음을 믿는다. 최선을 다해 공부는 했지만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주위에서 나만 지나가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의대를 수석졸업하고, 의사고시도 1등 했으며, 아직 총각’이라는 이야기였다. 자만심이 생기는 것 같아 기도를 많이 했다. 나의 학력과 성적만 보고 중매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결혼을 흥정처럼 생각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웠다. 배우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가난해도 성령 충만한 아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우리 가족을 친형제 이상으로 대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기도응답은 서른 살이 넘은 1982년 미국생활에서야 이루어졌다.

인턴생활은 힘들고 바빴다. 미국으로 들어가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병역의무를 치러야 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은 방위병으로 병역을 대신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방위병 근무를 통해 나를 철저히 깨뜨려 주셨다.

나도 모르게 서울대 수석졸업생이라는 교만이 들어와 있었는데 방위복을 입은 뒤 이것이 사라져 버렸다. 나이도 서너 살이 어린 고등학교 갓 졸업한 방위병이 단지 일주일 먼저 입대했다는 이유로 심한 욕을 하며 기합을 주는데 무한한 인내가 필요했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

방위병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는 나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 미국 대사관에서 건강진단서를 요청해 검진을 받고 보니 예전에 폐를 앓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사진으로는 미국에 가기 힘들다고 했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어머니는 일주일 기도하고 다시 X레이를 찍어 보자고 하셨다. 누나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전식구가 3일 금식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세밀히 그리고 정확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일주일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다시 X레이를 찍었더니 시꺼먼 흔적이 있던 부위가 사라져 있었다.

어렵게 여비와 생활비를 마련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비를 아끼느라 입양아를 데리고 나가는 일을 자청하여 비행기 표를 제공받았다. 뉴욕공항에 도착해 아이를 인계하고 나니 앞일이 막막했다. 동행했던 미국인의 집에서 하루를 신세지고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하지스 목사님 댁으로 가라는 영감이 왔다.

나의 계획은 미국 의사시험을 거쳐 내과의가 되는 것이었다. 대전에 살 때 어머님이 일을 도와주셨던 하지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마치고 필라델피아 멕키스 포트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늦게 버스에 내려 걱정을 하는데 한 할아버지가 하지스 목사를 안다며 교회에 전화를 걸어 주었고, 딘이란 분이 나를 데리러 왔다. 하지스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중이니 오늘밤은 자기 집에서 자고 내일 목사님을 만나라고 했다. 딘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3백여 명이 모인 미국인집회에 참석했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미국교회서 영어간증 술술…나도 놀라

딘은 다음날 집회에 가면서 예배가 끝난 뒤 간증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영어가 서툴러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딘은 예배가 끝난 뒤 한국인 친구 미스터 원의 간증이 있겠다고 광고를 하는 것이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눈을 감고 정말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단위에 올라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입에서 나도 놀랄 정도의 영어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해 역사하신 과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미시간대학에서 공부하며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의 인턴생활도 힘들었지만 미국이 더 힘들면 힘들었지 못하지는 않았다. 동양인 의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턴생활을 통해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부딪쳤다. 나의 주임교수인 아놀드 와이놀러 박사가 인종차별을 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환자 상황 보고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보고만 하면 꼬투리를 잡아 잘못 됐다고 창피를 주었다. 이것이 계속되다 보니 인턴 사이에서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를 괴롭히던 와이놀러 박사가 두 손을 바짝 든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취침시간에 최신 의학 잡지와 신문 등을 자세히 정독하곤 했다. 거의 두 번씩 빠짐없이 읽었다.

인종차별 미국 교수 실력으로 눌러

황인종이라고 나를 멸시하던 와이놀러 박사는 아침보고회에서 의학 잡지에 근거한 최신자료들을 인턴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날짜나 통계가 다소 틀렸다. 나는 그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와이놀러 박사는 인턴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내 머리 속에는 저녁마다 보았던 잡지내용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책을 통째로 외우며 공부했으니 당할 수 없었다.

와이놀러 박사가 백기를 들었다. 나를 부르더니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하나님의 주신 지혜의 은사라고 할 수는 없어 서울대학 출신은 다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내게 다른 병원에 갈 것을 권유했다.

전문의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3년 동안 수련의를 거쳐야 한다. 2년을 마쳐야 다른 병원에 가도록 돼 있는데 1년만 마친 내게 추천서를 써 준 것이다. 미국학생들보다 1년 일찍 내과 전문의시험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이 무렵 나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신 어머니는 내가 침대도 없는 작은 아파트에 지내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하셨다. 어머니의 이 모습을 보니 나의 마음이 더 아팠다.

개업 뒤 더 분발 ‘진료+전도’

미국의학협회의 개업의 시험을 통과한 1985년 병원을 개업했다.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주겠다며 남아줄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 레지던트로 있으면서 체험했지만 미국은 공공장소에서 전도하면 제재가 심했고,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사역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평생을 기도해 오시지 않았던가.

개업하기 전 미시간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민윤식 양을 어느 분의 소개로 만나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평범한 가정 출신인 그녀와 나는 신앙의 호흡이 맞았다. 데이트를 하면서도 서로 손잡고 기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어머니를 모시고 금식기도원으로 가서 3일간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 먼저 바른 삶을 살 것을 서원하고 기도한 것이다.

개업을 하면 주님이 도와주셔서 환자가 많이 몰려올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왔던 환자도 슬며시 되돌아갔다. 하루에 서너 명을 진찰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찾아온 환자들을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 진료했다. 그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화하며 병인을 찾아냈다.

어느 날 흑인환자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더니 자신이 존경하는 흑인목사가 당뇨가 심해 눈이 멀었는데 치료해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기다리는 환자가 없었으므로 모셔오라고 하여 병에 대해 1시간 정도 상담을 했고 약도 무료로 조제해 드렸다.

흑인목사님은 매우 감격해 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그로부터 동양인 의사가 친절하고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병원은 예약전화를 받을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물질 · 명예보다 구원 먼저

나의 일과는 새벽기도로 시작된다. 하루를 열기 전 어스름한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기쁨은 새로운 활력을 준다.

병원이 암전문병원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졌다. 수입도 늘어나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하나님의 선교사역도 열심히 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병원을 하나 더 인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 병원을 인수하면 연간수입이 약 30만 달러 정도 늘어날 수 있었다. 이 돈이면 자선사업이나 선교사업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바빠 도저히 새벽기도에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내가 많은 돈을 벌어 선교사업하고 자선사업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하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선교나 자선사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길을 분명이 열어 주신다. 수년전부터 나는 제 3세계, 즉 복음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하는 아프리카나 남미의 정글지역에 들어가 무료진료하며 선교하는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여기에는 많은 인력과 물질이 필요한데 이것을 하나님은 정확히 공급해 주신다.

미국 내 녹내장분야의 권위자인 한국인 S박사도 그중 한분이다. 나는 전도 대상자를 놓고 6개월 정도 준비기도를 하다가 복음을 전한다. 그래서 이분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의 반응이 나를 매우 무안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S박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눈물을 글썽이며 암에 걸렸다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안을 당한 뒤 나는 S박사가 곤고함을 당해서라도 주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S박사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교회기도 팀에 요청하고 나 역시 간절히 기도했다. 자신의 몸에서 암세포가 사라졌음을 확인한 S박사는 온전히 거듭난 신자로 변화되었다. 그는 해외 선교의 막강한 후원자가 됐다. 큰 액수의 헌금을 요청해도 선뜻 주셨고, 안과의가 필요하다면 본인이 직접 해결해 주셨다.

암치료 영적 각성 병행 필수

나의 전문분야는 암환자를 진료하는 것이다. 불치의 병인 암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런데 많은 암환자들을 대하다보면 일종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된다.

암환자 중에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울분을 참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 몸에는 자연적으로 나쁜 병균을 몰아내는 항균작용능력이 있다. 부신피질호르몬과 아드레날린 등이 바로 항균작용 물질들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고 즐겁고 기쁘면 이런 물질이 급속히 생성되는 반면 갈등과 번민, 원망과 고통이 마음속에 자리하면 이 물질들이 억제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상태가 병을 진전시키느냐 억제하느냐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이 자리 잡고 있으면 나쁜 균을 잡는 ‘경찰’물질이 생성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예수 믿어 변화되는 중요한 현상이 자신과 이웃과 모든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남의 확신과 영생을 소유할 때 우리에게 나쁜 불안과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우리의 모든 병과 고통을 초토화시키는 핵무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다. 이 기도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병을 물리칠 수 있다.

암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은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십니까?’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보다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 문제해결의 열쇠는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십시오.’라는 낮아지고 깨어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길어야 80세인 인생을 멋지고 풍요롭게 살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인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영혼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묻고 싶다.

[출처] 원종수 권사 신앙간증:암을 초토화시키는 핵무기-하나님과의 은밀한 기도 | 작성자  화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