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나눔

[스크랩]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글들을 퍼왔습니다.

주님의 일꾼 2013. 12. 29. 22:23

                                    

 

 

 

 

 

                                                                  이승만 박사의 쓸쓸한 최후

 

 

 

 


4.19가 1주일 지난 4월 26일, 이박사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28일, 이박사 부부는 경무대를 떠났다. 걸어서 이화장으로 가려 나섰지만 경무대로 달려온 팬들의 성화로 차에 올랐다. 이화장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이박사 내외를 따뜻하게 맞았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박사는 이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려 “여러 분, 우리 집에 놀러들 오시오” 하고 인사를 했다.

 

 

이화장은 일반 서민이 산다 해도 겨울을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서 냉동창고라고 이름나있었다. 이박사는 이를 코울터 장군에게 빌려주었지만, 난방시설도 없는데다 온수까지 나오지 않아 코울터 장군은 온수 시설 등 여러 가지 사설을 첨가했다. 그래도 코울터 장군 부인은 이화장이 춥고 불편하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코울터 장군 내외가 설치한 그 편의시설 마저, ‘가동하면 전기가 많이 든다’며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던 5월 24일, 하와이 한인동지회 회장을 하고 있던 최백렬씨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2-4주 정도 잠시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사랑하는 애견(해피)을 이웃에 맡기고 이박사 부부는 5월 29일 오전 이화장을 나섰다.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테니 집을 잘 봐줘요” 이것이 마당에 모인 이웃들에 남긴 이박사의 마지막 인사가 됐다.

 

 

그가 호놀루루 공항에 도착한 것은 5월 29일 오후 2:30분, 공항에는 하와이 교민들이 잔뜩 마중 나와 있었다. 짐은 전부 4개, 부부의 옷이 든 트렁크 두 개, 타이프라이터 그리고 마실 것과 점심과 약품 상자뿐이었다. 서울 김포공항에서는 내외분의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미국에서는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세관검색을 생략했다.

 

이박사 곁을 늘 지켰던 오중정씨는 호놀루루 마키기 가에 있는 집을 “쬐끄만 집”이라고 표현한다.

 

“마키키의 작은 집, 아예 쪼끄만 집, 마당까지 합해서 30평이나 돌까, 1층에는 지하실까지 해서 창고 같은 방이 하나, 뒤에는 작은 뜰이 있었고, 2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을까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 그뿐이었어요. 이박사가 거기에 신문지를 갖다 놓고 붓글씨를 쓰곤 했지요. 지금도 이 집은 있지만 수리를 해서 조금 모양이 변했지요”

 

 

이 집에 교포들이 자신들이 쓰던 책상과 식탁과 주방도구들을 가져왔다, 가로 1.2m, 세로 90cm의 알루미늄 식탁, 그 식탁이 지금 이화장에 전시돼 있다 한다. 하와이로 간 후 이박사 내외는 그를 존경하는 한인 및 미국인들이 보내주는 푼돈으로 지극히 검소한 소식과 외출 없는 생활로 일관하면서 오직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고국에 갈 날만 갈망하고 살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청빈의 상징이었다. 대통령의 겉옷은 화려하지 않은 옷가지를 두고두고 손질하여 입혔고, 속옷은 더 이상 기울 수 없을 때가지 누덕 누덕 기워서 입혔다.

 

오랜 동안 남편의 병 구환을 하다가 졸도했던 관계로 남편의 유해와 함께 고국에 올 수 없었던 여사는 푼푼이 모은 돈 3천 달러를 고쟁이 주머니에 간직한 채 어느 날서울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틀니부터 맞추자 했다. 단 한 푼이라도 고국에서 써야한다는 고집스런 집념 때문에 하와이에서 여러 해 동안 틀니를 하지 않은 채 생활했던 것이다. 기력이 쇠잔하여 틀니를 끼지 못한 채 생활하던 도중 며느리에 각별한 부탁을 했다. “내가 이 박사 옆으로 갈 때에는 꼭 틀니를 끼워서 보내라. 이 빠진 할머니 모습으로 남편에게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내 장례식 때 꽃다발을 장식하지 말아, 그 돈은 없는 사람들이 써야 할 귀한 돈이다”

하와이는 이박사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하와이로 올 때는 자유 의사에 따라 왔지만 장면-윤보선 정부는 물론 박정희 정부에서까지 그의 귀국을 하락하지 않았다. 주치의로부터 이박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주변인사들은 이박사의 환국운동을 벌였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환국하려면 사과부터 하라고 했다. 이박사의 건강은 혈압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인사들이 이 충격적인 말을 이박사에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사과문을 발표했다.

 

1962년 3월 17일, 이박사 내외는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들뜬 기분으로 공항으로 가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박정희 정부는 그의 환국을 끝내 거부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이박사의 생명은 극도로 단축됐다. 1965년 7월 19일 0:35분, 그는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아내와 양아들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를 토해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운명했다.

 

그가 없었으면 지금의 조국도 없었건만, 그는 그가 창조해낸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객지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7월 21일 오후 4:30분 시작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의 영결식이 끝나고, 유해는 하컴 미공군 기지로 옮겨졌다. 10:30분부터 시작된 미국측의 영결식, 공군 의장대의 조포와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의 추도사와 진혼나팔 소리로 장식됐다.

 

유해는 미군 의장대에 의해 C-118 특별기에 올랐다. 밴프리트 장군을 위시하여 그를 존경하던 미군 장군들 16명이 이박사와 함께 특별기에 올랐다. 그가 하와이에서 오직 서쪽 하늘만을 바라보며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 5년 2개월은 이렇게 막을 내렸고, 바로 이것이 향년 90세로 생을 마감한 이박사의 쓸쓸한 황혼이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 무쌍한 이승만, 세계인들은 그를 처칠과 드골 급의 거물지도자로 칭송하지만 유독 그가 세운 이 나라 이 강토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에게 끝없는 증오와 돌멩이를 던지고 있다.

 

 

위 내용은 1988년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을 읽고 간단히 추린 글이다.

 

 


2013.12.29.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의 일기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개발계획 

 

 

 

 

 

 

충주 비료공장, 한국유리공업, 문경시멘트공장 등을 설립하고 PL-480(한미잉여농산물원조협정)으로 식량 자급률 78%였던 한국의 식량문제를 단숨에 해결하였고 이른바 3백산업으로 불리는 신흥산업을 번성시키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1955년에는 영암선을 개통하여 석탄을 서울로 직송하여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었다.

또한, 자력법을 공포하고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1950년대 말부터 원자력개발체제를 갖추도록 지시한다. 이승만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 편, 미국이 인도, 터키에 대규모 원조를 했었는데 이들이 사회주의 경제 개발을 추구하며 미국에 등을 돌리게된다. 하여 미국은 한국에 지원을 꺼리게되는데 이승만이 경제개발에 민간기업을 최대한 참여시키고 기술적으로나 자금적으로 민간기업에서는 힘든 부분을 정부가 담당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어 미국의 마음을 돌리고 결국 산업개발위원회를 설립하여 계획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된다.


이승만의 공은 인적네트워크에서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승만은 자원이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사람이 인재라는것을 인식하였고, 인적자원을 개발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대 정부예산 중 국방비가 절반이었음에도 문교예산을 20%정도로 운용하여 교육인프라를 확장하는데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1945년 80%가 넘던 13세 이상 문맹률이 1959년에는 15%정도로 낮아졌고 초등학교 취학률을 1946년 53.4%에서 58년 95.2%까지 올리며 초등교육 의무화를 이뤄냈다. 또한 48~60년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률이 4배이상 오르고 이승만 정권 말에는 대학진학률이 당시 제2경제대국인 영국보다도 높은 수치를 기록한다.

또한 AID의 기술원조계획을 이용, 국내와 해외대학을 연결하여 해외유학을 장려하기도 하였고 수많은 대학교 시설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기업, 산업체의 기술자를 해외로 연수보내 외국의 기술력을 배워오도록 장려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이들이 한국의 산업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당시 미국이 최신식 화력발전소를 한국과 파키스탄에 동시에 지어줬는데 한국은 준비된 인력 180명을 즉시 투입하여 발전소를 운용하였는데, 파키스탄은 준비된 인력이 없어 1500명을 투입해야 했다. 이승만의 인적네트워크 개발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흔히 경제개발계획이라고 하면 박정희를 떠올리거나, 박정희를 부정하는 좌파들은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나 둘 다 틀렸다.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1953년 전쟁중 발표된 UNKRA(국제연합한국부흥단)의 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이 시초이며 당시 이승만 내각에서는 이 계획에 이의가 많았으나 이승만은 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여 해외에 유학을 다녀온 인재를 대거 기용하였다. 결국 이들이 이승만이 하야하고나서도 이 계획이 계승되어 장면정권으로 그리고 박정희정권대에 실행된것이다.

 

 

 

 

 

 

 

출처 : 큰믿음교회
글쓴이 : rockligh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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