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세계

성령의 은사와 능력

주님의 일꾼 2010. 3. 21. 23:27
 

성령의 은사와 능력


part 1. 글을 시작하며


저는 오늘 여러분께 천국의 비밀을 한 가지 공개할까 합니다.

천국은 강한 자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강한 자가 천국의 시민권을

획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오늘 말하려는 천국은 사후세계(죽은 후 가는)의 천국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속에 임하는 천국이며(눅17:21)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완성되어가는 천국이며 강한 자들로 인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져 와 생전에 바라볼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1-12절은 이 비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구절을 살펴보면 천국에 거하는 자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가장 큰 선지자보다

더 큰 사람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보다도 모세보다도 이사야보다도

천국에 진입한 사람은 더욱 영적으로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세례요한 이후부터 천국은 그 경건에 속한 능력들을 (구약때와는 다르게)

천국을 소유하고자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내어주기 시작했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마태복음 11장 12절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침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하나님 나라)을 차지(소유)한다.


힘을 쓰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12장 28절이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힘을 쓰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하나님 나라에 진입하게 된다)


만약 천국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의 집에 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성령으로 무장된

후에야 비로써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천국의 그 무엇을 가져오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11: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우리는 마귀보다 강해져야 합니다. 질병보다 위대해져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써 천국에

스며드는(천국에 침노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모든 능력을 우리

삶속에 가져오게 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에 침투해 들어와 좋은 것들을 약탈해 가려는

모든 마귀적인 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 어둠의 권세자들과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으로 강건해져 모든 능력으로 넘치도록 에베소서 3장 16-20절을 따라 예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시옵소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연약한 나로 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생명의 능력으로 넘치시는 그리스도 예수로 사시게 하려 함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온 세상은 지금도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니다.

하늘과 땅, 대지와 수평선은 생명력으로 넘치는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네! 성령님은 그렇게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야 되야 비로써 내게 구원의 능력이 되듯이

온 우주를 덮는 성령의 능력도 내 안으로 들어와 역사하고 운행해야 비로써

천국을 내게 가져 올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자고 계신 성령의 운행하심이 활성화 되어 활활 타오를수 있도록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흘러 넘치시도록 특별히 간구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될 때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모든 신기한 능력과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알게 되며 예수님께서 우리로 무엇을 위해 살도록 부르셨는지 알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속한 모든 것을 주시려는 계획을 나타내시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요한 계시록을 보면 성령을 세상에 보낸 일곱 영(계5:6)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린고전서 12장에 쓰여 있듯이 역사하는 모습(은사)은 다양하나 모든 것이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 풍성한 약속을 따라 어떠한 능력들로 우리를 채워주실 수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들을 우선적으로 찾고 구하여 성령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어떻게 바꾸시는지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모든 신령한 것들에 대해 사모하는 갈급함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때문에 지금부터 저는 성경의 깨달음과 체험을 통해 제가 알게 된 모든 은사에 대한

내용들을 열심히 풀 것이며 이 가르침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하게 와 닿아서

그것들을 간절히 구하게 되고 여러분의 영을 만지시는 성령의 운행하심을 경험케 되는

복된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6-11]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part 2. 지식


○ 깨달음, 계시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세상적인 지식과는 다릅니다.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아는 것>만이 참 지식이라고 성경은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지식의 은사를 우리가 받게 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계시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감추었졌고 덮여졌던 비밀스런 일들이 들어나는 것이 계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잠만 오고 도통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고 헛갈리기만 하다가

지식의 은사가 우리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말씀이 재미있어지고 쉽게 이해되고

성경의 깊은 뜻까지도 능히 통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은사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계시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해서는 깨닫게 하는 지식의 은사를 부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친밀, 교제


우리가 성령의 은사인 지식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속 마음을 알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 외에는 하나님의 속 마음을 아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안다는 것은 매우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가능하게 되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갖게 됩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우리는

원활하게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면서도 어떤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올 때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어느날 내 핸드폰으로 한 문자가 왔다고 합시다. 내용을 보니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내용인데 이름은 내가 아는 친구에게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믿을만한 정보인지 그 친구가 보낸 문자가 맞는지 아니면 누군가가

친구의 번호를 빙자하여 장난으로 보낸 문자인지를 알아차리려면 평소 그 친구의 성품과

인격을 내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대화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마귀의 음성을 분별해 낼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이라 여겨지는

말씀에만 확신 있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41-42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친밀함(교제)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시편 25:14)고 했으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있기 때문(잠언1:7)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비전과 리더십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지식을 가지고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영혼을

위해 매우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이는 뜻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상대방을 위해 축복해 주는 것보다 훨씬 유익한 일이라고 사도바울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성경은 백성이 묵시(계시, 깨달음)가 없으면 방자히 행하게 되며(잠언29:18) 결국 망하게 된다(호세아4:6)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KJV 영어성경에서는 묵시를 Vision 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망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달려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 마음속에 비전을 심어 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는 시대의 포론티어(frontier) - 선지자와 개척자입니다.

 

저는 많은 형제들이 리더십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아왔는데 대부분은 외적인 카리스마를

가지는데만 급급해 진정한 카리스마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리더십이란 개인과 공동체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성(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때문에 본인이 먼저 불타는 비전(Burning Hope)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면 느헤미야나 모세처럼 강한 리더십으로 회중을 인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영적 리더십으로 늘 고민에 빠지시는 분들은 이제 진정으로 지식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시길 빕니다


part 3. 지혜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하나님은 우리가 신령한 지혜에 있어 장성한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혜는 세상적인 지식으로부터 비롯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지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지혜입니다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해석과 적용,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


성령의 지혜는 모든 영적 비밀을 푸는 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계시(꿈, 환상)를 상황에 적절하게 해석, 적용함으로써 자신과 교회, 넓게는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구슬(값진 지식)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계시와

성경적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각각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의 유익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위기를 대처해 내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도 풀지 못하던

애굽왕의 꿈을 간단히 풀어 냈으며 그로 인해 애굽을 큰 위기에서 건져내고

자신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창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중략)

41:38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41: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다니엘 또한 하나님의 지혜(해석)가 함께 하셨는데 그 나라의 모든 학자들과 무당들도 풀지 못한 꿈을 간단히 풀어냈습니다(다니엘2장 中)


단 2: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런 능력의 나타남은 악하고 혼란스런 시대에 믿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니엘과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 관원들의 지혜를 눌렀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앞서고 더 뛰어난

자가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될 것입니다


모든 세대에 걸쳐 인류가 부러워하는 이러한 삶의 문제에 대한 혁신적인 통찰력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우리에게만 주어진 것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를 통해 운영되는 기업과 병원,

학교와 문화공간들이 세워질 것이며 이는 사단의 타락한 지혜를 따라 세워진 세상의 모든

악한 권세들을 이길 병기가 될 것입니다


지식은 마음속에 영적 지경을 넓혀주는 능력이지만 지혜는 세상 속에서 영적 지경을

넓혀주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지혜와 늘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친밀한 하나님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거친 세상과 맞설수록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만 커지기 때문에 차라리 외딴 곳으로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는 편이 더 낳을 것입니다.


○ 힘있는 말, 거짓을 파하는 강력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모든 세상적 초등학문들을 꿰뚫어 하나로 통하는 하나님의

우주적 진리에 대한 고차원적 이해를 가지게 됩니다. 때문에 어떤 이와 다양한 변론을

해도 그것을 능히 반박하고 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신비롭고 강력한 것으로 솔로몬과 스데반 안에서도 운행하던 지혜입니다


[왕상10:1-10]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이에 저가 금 일백 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것처럼 많은 향품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


[사도행전 6:9-10 공동번역] 그 때 이른바 "자유인의 회당" 에 소속된 키레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일어나 스테파노(스데반)와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와 성령을 받아 말하는> 스테파노(스데반)를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사도바울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지혜를 설명하고 있는데 자신은 세상의 지혜로

전도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지혜)으로 전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2장中)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지혜가 없는 상태로 영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면

대화가 소모적으로 흐를 뿐만 아니라 무익하고 허탄한 논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혜의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평소 대화할 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곧잘 오해하고

요점 없는 논쟁으로 감정이 자주 상케 되는 분들은 성령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 안에 감정과 생각들을 잘 정리할만한 지혜(통찰력)가 없는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불필요한 에너지를 계속 소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영적 원리를 깨닫고 적용하는 힘


또한 지혜는 세상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영적인 원리를 통해서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고 계시는지 그 영적인 원리를

깨닫고 해답을 내릴 줄 아는 자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래서 사도들은 복잡한 교회의 운영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들에게 위임했습니다.


[사도행전 6:2-3] 공동번역 그래서 열 두 사도가 신도들을 모두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제쳐 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내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건강과 직장과 결혼문제, 자녀문제와 기타 수많은 문제들을 대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적인 지식과 지혜의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해결함을 줄 수 있는 일체의 영적 비결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넘치는 지혜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약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part 4. 병고침


우리가 은사 하면 즉시로 떠올리는 것이 병고침의 은사일 만큼 병 고침에 대한 성령의 권위는 확실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병고침이 성령의 은사 중 하나라는 것을 진부하게 다시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병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까지 병고침의 능력을 계속 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모든 은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부어지는 성령의 정도에 따라 우리를 통해 운행하시는 성령의 능력도 천차만별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았다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랑의 분량을 가지는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되어진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지식의 은사를 받은 자도 기름부으심의 정도에 따라 깨닫는 깊이와 범위가 모두 다르듯이 병고침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병고침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늘 걱정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 병 고침의 능력 안에서 고쳐지지 않는 어떤 병자를 만날 때

우리는 즉시로 고쳐지지 않는 병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떤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 사람에 대한 병고침의 노력을 아예 포기해 버리기 일수입니다.

혹은 어떤 고쳐지지 않는 특정 병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병고침의 능력은 여기까지라

여기며 의기소침하여 병고침 사역 자체를 아예 그만두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과거 저의 모습이었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모든 병을 즉시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충만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병이 당신들 자녀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도 우리 영혼에 나름의 유익을 끼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악을 늘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 가운데서 경험되어질 수 있는 낮은 수준의 은혜가 어떻게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폭포수 같은 해방의 기쁨을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근본적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모든 자녀들을 늘 민망히 여기시며

그 모든 병을 고쳐주셨던 예수님의 마음과 시각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행5: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우리는 고쳐지지 않는 병마 앞에서 쉬이 좌절하며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그것을 제어할 만큼 강한 능력이 우리에게 올때까지 천국문을 두두려야 합니다


내 영혼이 모든 병마보다 강해질때야 비로써 모든 병마를 제어할수 있기 때문입니다[눅11:21-22]

 

part 5. 능력 행함 


행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큰 기사와 표적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이 능력 행함은 다양한 모습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능력 행함의 대표적인 인물은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오게도 하고 우물에 가라앉았던 도끼를 떠오르게도 했으며

물을 옷으로 쳐 가르거나 죽은 사람을 안아 살려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몇천명에 이르는

사람을 먹이셨고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으며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고

무화과 나무를 뿌리로부터 마르게 하는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과 구약의 능력 행함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기적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신약의 기적은 사람들을 전도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엘리야가 보여준 것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기적을 예수님께도 보여 주시라고 청했습니다. 만약 그리 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믿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시며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눅11:29-30]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마12:38-4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는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큰 성 니느웨로

보낸 선지자인데 그의 가르침을 듣고 모든 성이 다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재미있게도 구약의 그 어떤 선지자도 한 도시를 주님께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탄식하는 선지자였으며 능력이 많았던 엘리야조차도 반평생을

그를 죽이고자 하는 왕비에게 쫓겨 다니던 신세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증거를 엘리야의 사역이 아닌

요나의 사역적인 증거에서 찾고자 하셨습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었던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상 최고의 기적이

일어날 것임을 예수님께서 내비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 니느웨 성이 회개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하심

이후 세상이 급격히 주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는 일은 기적 이상의 기적입니다

여러분이 한 영혼을 전도해 보려 하신 적이 있으시다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여지는 몇가지 신비로운 조화보다 훨씬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진정한 기적과 능력은 전도하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고린도전서12장이 특별히 능력 행함이라고 구분 짓고 있는 이 은사를

저는 전도의 은사로 바꾸어 불러도 좋다고 과감히 이야기합니다.


전도자 사도바울은 한 섬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독사를 불 가운데 떨어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능력을 행합니다(행28:3-6)

이처럼 전도의 능력을 받은 자는 기적이 평범한 일상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현란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더욱 음란해진 우리는 눈과 마음이

당장에 보여지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구하려고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구함에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기적을 구하기 전에 전도의 불붙는 능력을 여러분께서 구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따르는 표적으로 더욱 확실하게 여러분의 사역를 보장하실 것입니다.


part 6. 예언


○ 인도하심


사도바울은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특별히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언이 장래의 어떤 일을 맞추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맞은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세속적인 개념의 예언에만 묶여있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예언의 범주를 모두 살펴 볼 때 우리는 그것을 -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총체적 메시지 - 라 표현함이 더 옳을 것입니다.


예언은 마치 항해자의 나침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자녀들에게 꿈과 환상과

기타 다양한 예언적 현상들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자녀들을 하나님과 계획하심 가운데로

불러 내시는 훌륭한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예언의 은사는 매우 수준 높은 은사로써 지혜와 계시가 동시에 작동(운행)할 때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꿈, 이상 등)와

그것을 풀고 적용할 줄 아는 지혜가 동시에 작동될 때 나타나는 은사입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는 예언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비로써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대언해 주는 예언자의 음성을 통해 혹은 직접 예언적 현상을 겪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보자기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이방을

향한 전도의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알게 되었으며(행11장 中) 사도바울은 아시아로

전도를 가려 하다가 계속 예수의 영(인도하는 예언적 영)이 가지 못하게 가로막아

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행16장7절)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예언적 기름부으심이 임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꼭 다른 사람을 위해 예언해 주려는 목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언적 은사가 내 영혼에 풍성히 나타나길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대언, 상담과 가르침


이런 포괄적인 예언적 개념에서 벗어나 이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특별히

예언의 은사라고 지칭하며 다루고자 했던 예언의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예언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말을 전함으로써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예언의 <대언적 기능>을 지칭하는 것으로써 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그의 영혼에 덕을 세우는 상담적인 예언의 기능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언을 통해 사람들에게 분명한 유익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예언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불안한 발걸음을 띠는 자들에게 확신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믿음에 불을 지르고 하나님의 일에 가속을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고통의 사슬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문제의 해결책을 정확히 제시하여

우리를 사단적 올무에서 해방시켜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행할 때 우리를 훈계하시며 가르치시기도 합니다


고전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그렇게 모든 예언은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의 인격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통로가 됨으로써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더하게 합니다.


이처럼 예언은 점이나 사주팔자 같이 단순히 미래 정보를 상대방에서 전달하는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 교류를 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 보호하심


예언의 특별한 기능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할 때 아비 요셉이 꾼 꿈입니다.


마2: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또 바울이 바다를 통해 로마로 압송되던 때에 본 이상입니다.


사도행전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7: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7: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7: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아가보란 예언자는 흉년을 예언했고 모든 교회가 이 예언에 따라 기근에 적극적으로 대비했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생명과 일상적인 생활고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예언의 영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던지 내 자신을 유익하게 하던지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 가운데 자주 나타나게 하시려면 예언의 은사를 구해야 할 것이라는데 우리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part 7. 방언


방언에 대해서는 많은 편견과 오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편견들은 모두 방언을

받지 않은 자들이 만들어낸 편견들인데 그 상상력은 놀라움을 금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방언을 받으면 더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방언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부터

방언을 받았을 때는 자기 통제가 되지 않는 어떤 상태가 될 것이 두렵다는 사람부터

경망스러운 모습 때문에 부끄러워 받지 않겠다는 사람, 난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으니

받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방언에 대한 주관적인 오해와 편견은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최초의 성령충만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을때도 그랬듯이

방언은 성령충만의 가장 흔하면서도 핵심적인 첫 번째 증거로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방언을 체험했으며 그 때문에 방언은

늘 심심풀이 땅콩식으로 논쟁의 도마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 자신의 덕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후략)


성경은 (방언을 포함한) 모든 성령의 나타나심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주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방언에 대한 염려와 편견들은 모두 다 방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생각들일 뿐입니다.


먼저 방언을 받으면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대한 반박입니다

방언을 받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 외에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도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더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실 기도를 언제든지 쉽게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경은 방언을 다른 나라 언어, 혹은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이 각 나라말로 하나님을 높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전13장1절에서는 <네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라고 말하면서 방언을 천사의 말로써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경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다른 나라 언어를 처음 접할 때 느끼는 이질감 같은 것으로써 그것이

방언의 순기능을 무시할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방언이 경망스러워 안

하겠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도 방언을 당신의 뜻대로 나눠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숩게 만드는 일이며 우리의 믿음의 선조인 사도들과 및 사도시대의

제자들은 모두 방언으로 기도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당신처럼 영적인 유익보다

위엄이나 체면 따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방언은 무당들처럼 귀신들린 상태나 어떤 혼미한 마법의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면서 기도에 열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그런 편견에

빠지는 것 같은데 모든 방언을 받은 사람들의 경험적 증거에 따르면(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매우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방언을 말합니다. 우리는 방언을 중단하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집에 두고 온 꿀떡을 생각하면서도 혀를 통해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내가 아닌 내 안에 성령께서 기도하시록 내 시간과 혀를 내어 드리는 것 뿐이지

성령께서 나의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아간 상태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드리고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더 깊고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과 함께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의 협조이시지 귀신들림과 같은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방언을 받으면 기도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방언은 마지 엔진에 기름칠을 하는 것과 같은 능력으로써 우리의 모든 잠자는

영적인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은 가장 초보적이고 기본적인 은사이면서 동시에 가장 필수적이고도

중요한 은사인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뜻에 따라 주신 은사 중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성경의 증언을

믿고 있으며 사도바울처럼 더욱 많은 방언으로 말하며 기도하는 것에 대해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part 8. 방언통역


○ 마음으로 열매 맺는 기도


방언이 있는 교회는 필히 방언 통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예언이 다른 사람에게

덕을 끼치듯이 방언통역도 방언하는 자에게 덕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고전14:5 (선략)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만약 자기 방언을 통역하게 되면 우리는 한국말과 다른 언어의 기도가 동시에 나오는 것을 경험케 됩니다. 입술에서 방언이 나오고 마음에서는 (번역된) 한국말의 기도가 나오게 되는데 (저를 포함하여) 방언통변을 경험하신 분들은 모두 이것에 대해 말씀하시길 이 둘은 거의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무엇이 더 먼저이고 후인지 사실 분간하기 힘들다고 말하십니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면서 또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 간구하게 하시는지 들으면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내내 뜨거워지며 그 영의 기도한 바대로 행하려는 영적인 욕구도 함께 생겨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통변의 능이 있을 때 기도를 통해 영적인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을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마음에 열매를 맺는 기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4:14).


○ 예언적 방언통역


다른 사람을 상담해 주기 위해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것을 즉시로 통역해 대언하는 경우

방언과 방언통역이 결합된 예언적 형태의 은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실 예언의 은사 안에 지혜(해석)의 은사가 있고 병고침의 은사 안에 믿음(기도)의 은사가 있고 지식의 은사 안에 에언(계시)의 은사가 있듯이 은사는 서로 맛물려 움직이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서 모든 은사의 경중을 따짐 없이 더욱 풍성히 받아 누리시게 되시길 바랄

뿐입니다


part 9. 믿음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 대해 다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서 말하기조차 힘듭니다. 특별히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히브리서11장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믿음의 영역은 고린도전서12장에서 은사로써 언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기적을 일으키는 기도의 은사


저는 특별히 이 믿음을 기도의 은사로 바꾸어 불러도 무방하다 생각합니다.

분명 어떠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믿음으로 무엇을 구하여 받기를 즐거워하고

사모하는 심령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머리가 빨리 자라게 하는 것이나 작은 종기 하나를 치료받아야 할 일이나

학비를 버는 일 등에 있어서 우리는 병원을 찾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여러 가지

생활상식을 이용해 그 문제들을 빨리 해결해 버리곤 하는데 어떤 이들은

고집스럽고 미련할 정도로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이것들을 기어코 받아내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자들은 실제로 무엇이든지 구한 것은 다 받은 줄로 믿고 있으며(막11:24) 믿고

선포한 것은 다 그대로 될 것이라 믿고 있으며(막11:23) 한번 구하기 시작한 것은

끝까지 강청해 받아내고야 마는 자들(눅11:24)입니다.


이러한 단순하지만 강력한 믿음을 따라 사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자주

하나님의 위대한 손(기적)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 중보의 은사


교회의 구성원들을 살펴볼 때 못 배우고 연약한 할머니 집사님들이 유독 이 믿음의 은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지혜롭거나 지식에 넘치는 은사를 받진 못했지만

불타는 믿음의 은사 하나로 늘 천국을 침노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중보자로써의 직임을 담당하기에도 좋은 자들로써 실제로 영적 전투에도

능한 자들일 때가 많습니다. 이들의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기도는 (보통 예언의 은사와

결합되어) 대적의 문을 취하며 영적인 리더들을 보호하는 방패 역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이 대부분 개인적인 중보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은사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의 은사로부터 나타나는 이 중보의 은사에 대해 저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일수록 더욱 치열하게 벌어질 영적 전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얼마나 중보가 필요한 것인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아멜렉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 기록을 살펴보면 


창 17: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최전방에서 하나님의 전선을 넓히는 군대장관이고 사도시대로 따지면

여호수아는 사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귀와 대적해 싸우는 강력한 능(지식과 지혜와 병고침과 병마를 제어하는 은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항하는 마귀도 반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를

이용해 자신들의 방어 전선을 형성하는데 이들이 실제로 짐승(세상임금과 관원들)을 동원해

하나님의 사도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12: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베드로가 감옥에 잡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해 중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감옥에

나타나 그를 옥에서 풀어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몸 가운데 많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들은 마귀의 배후를 찌르는 특공대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전세를 뒤바꾸어

우리편에 승리를 가져다 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part 10. 영분별


방언이 은사의 시작이라면 영분별은 은사의 마지막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입니다

방언은 모든 은사를 풀어내지만 영분별은 모든 은사의 오류를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를 좇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조건

이러한 것들을 수용하지 말고 시험해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거짓 가르침)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어떤 이들은 영분별을 귀신을 찾아내고 좇아내는 능력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영분별은 위의 성경구절과 아래 제시한 성경구절들이

모두 보여주고 있듯이 거짓 진리의 대한 판별능력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예언자 즉 거짓 선지자와 교사가 이 시대에 횡횡할 것에 대해 성경이 계속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예언이나 영적인 가르침이든지 분별하며 들어야 하고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딤전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고전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마귀는 입으로 역사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우리가 공포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며 자신의 정체를 쉬이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짓의 아비(요8:44)이며 그래서 늘 자신들의 거짓이 탄로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좋은 도구는 거짓말입니다.


계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광명의 천사를 가장 환상과 꿈)의 입과 짐승(세상관원들의 거짓말)의 입과 거짓 선지자(거짓진리, 거짓교사)의 입에서 나오니

16: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영분별은 이미 다양한 은사를 경험하고 믿음의 분량이 깊어진 자에게 더해지는

능력으로써 영적인 세계를 배우는 후진들을 감독하고 권면할 자리에 있는 자에게는

필수적인 은사입니다.


거짓 진리(예: 선행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참 진리의 은사를 가진 자가 분별해 낼 수 있고

거짓 적용(예: 율법적 적용)은 참된 지혜를 가진 자가 분별해 낼 수 있고

거짓 예언은 참 예언을 가진 두 세사람의 입으로 확증할 수 있으며

거짓 방언은 방언 통변을 통해 분별 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은사의 사용까지도 혼란에 빠뜨려 모든 성령의 운행하심을 마비시키려는

이 악한 삼위(용,짐승,거짓선지자)의 공격을 영분별의 은사로 이겨내야 합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견고히 서가는 성령의 전이 될 때까지 함께 영분별을 구해 봅시다.


part 11. 사랑


고린도 전서 12장이 마무리되면서 사도바울은 뜻하지 않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신령한 단어들만 등장하다가 너무 평이한 단어가 눈에

보이자 어리둥절해 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 또한 그런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그 유명한 고전13장 바로 사랑의 장이 시작됩니다.


사랑은 가장 크고 좋은 은사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 100% 공감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 계셨지만 우리를 모두 구원하실 능력은

사랑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 우주적이고도 강력한 사랑이 모든

마귀의 거짓말과 능력을 깨 부셔뜨려 버렸습니다.


저 또한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예언을 동원해도 병고침을 동원해도 지혜와 온갖 아는

지식을 다 동원해 보아도 주님께 붙들리게 하지 못했던 영혼들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마귀의 최후 진조차도 무너뜨려 버리는 강력 중에 강력입니다


또한 사랑은 우리로 더욱 많은 은사를 구하게끔 만들어 주는 기폭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할수록 영혼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무한대로 증폭되어

많은 사람들을 건져 내기에는 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안에 모든 은사에 대한 간절함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따라 신령한 은사들을 구하라는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고전14:1)


여러분! 반드시 아셔야만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랑에 강하지 않은 자는 지속적이고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고 고통받고

자기에게 자기부인이 요구될 때면 물러서 버리고 마는 그런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시사하셨습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지만 우리 힘으로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그러니 사랑이 신령한 은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는 중입니다.

수많은 고통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수백번도 도망치고 싶어지는 순간들 앞에서도

계속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하시고 도리어 상대방을 격려하고 높이는 사랑으로

내 안에 다른 능력(완전히 나의 감정과 독립적으로 움직여 하나님의 의지대로 계속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사랑이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려면 성령의 운행하심이 내 안에서 더욱 깊어져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도 누군가를 조건없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부족함을 덮을만한 그렇게 이쁘게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주님의 눈을 달라고 마음을 다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강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운행을 느낍니다. 


여러분! 사랑의 은사가 없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느끼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신령한 은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은사와 함께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부분을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면서

이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저는 사랑에 대해 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위의 모든 은사들도 모두 그렇지만 여러분에게 사랑의 불붙는 능력이 경험되어지길

특별하고 간절하게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비로써 그때야 아래의 모든 성경 말씀들이 마음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설교 : 이금훈

배포 : 왕같은 제사장 교회

자료출처 : http://kingchurch.com.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