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나눔

[스크랩] 헬조선no! 대한민국은 헤븐대한민국이다!

주님의 일꾼 2017. 12. 25. 23:45

1. 아름다운 금수강산

첫번째는 강화갯벌,


두번째는 통영 소매물도

세번째는 한라산

네번째는 북한에 금강산

다섯번째는 인천 덕적도 서포리해수욕장

여섯번째는 북한산

7번째는 지리산 천왕봉

8번째는 북한 개마고원

9번째는 거제도 해금강

10번째는 강원도 동강

11번째는 백두산

12번째는 단양 도담삼봉

13번째는 설악산 토왕성폭포

14번째는 독도

15번째는 북한산

16번째는 전남 홍도

17 제주도 한라산


18 설악산

19 단양 옥순봉

20번째는 제주도 우도


21번째는 이름은 까먹었지만 제주도 본섬에 해변가 사진


24 서귀포 주상절리


2. 열심히 하면은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 나라


행정고시 공부사진


3. 교도소 수형자들도 인간대우를 해 주는 나라!



위에 두개는 러시아 교도소 사진




위에 세 개는 프랑스 교도소 사진입니다.(제가 좋아서 구한 것이 아닌 대한민국이 범죄자들에게도 국민에 권리를 인정하고 대우해주는 얼마나 좋은 나라 인지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래서 비교를 할 목적으로 했습니다.) 밑에는 대한민국 교도소 사진입니다.



4. 통일이 되면 대박인 나라


여러분 혹시 이 말을 들었을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거지 된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지 제가 팩트 체크를 해 드리겠습니다.

통일이 된다면 거지된다는 말! =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밑에 나온 내용을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좌파정권은 통일이 되면은 "서울에 북한서 온 거지들이 들끊게 된다","남과 북이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근데 이것은 거짓입니다!

통일이 되면 한국교회는 북한 지하교회와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까지 합해져서 영적으로 대박이 될 것이고 그리고 그 대박은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복음으로 회복시키고 그리고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할 제사장 국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로 통일은 영적 대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동남아 처럼 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대박이 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 북한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그네사이트라는 광물자원은 세계 3위권이고 우라늄은 세계 1위입니다. 금은 세계 1위인 남아공의 3분의 1 가량이, 철은 세계 1위인 브라질의 4분의 1 정도가 매장되어 있습니다. 반도체 원료로 각광받는 희토류도 풍부합니다. 2012년 국회에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북한 지하자원의 가치는 7,000조 이상입니다. 북한자원연구소는 2010년 북한의 자원가치를 1경 1,026조로 추정했습니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지하자원을 개발하면 통일에 필요한 비용을 치르고도 넉넉히 남습니다.

2,  땅값으로도 통일대박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권이 동북아시아 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경제규모를 합치면 유럽연합 보다 크고 미국보다도 큽니다. 경제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지역, 사람과 물자가 가장 풍부하며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지역입니다.
대륙전략연구소 박승제 박사는 자유통일의 가장 큰 기대가치는 "땅 값"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4조 투자한 새만금 지역이 40조원 가치가 되었듯 북한의 자유화 이후 토지가격은 그 즉시 수십 배에서 수백 배 상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토지개발로 얻어질 이익은 통일비용을 초기단계에서 상쇄해버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이 더 좋고 더 넓은 부지를 찾아 북한에 달려오면서 그 이익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3.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 거점도시의 경쟁력은 커다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한중일 3국과 러시아 유럽을 이어줄 수 있는 허브이자 중국과 러시아는 바로 붙어 있습니다. 남과 북의 철도가 연결되고 그것이 러시아와 연결되면 부산에서 출바한 기차가 유럽 전역으로 뻗어 갈 수 있고 그래서 서울에서 기차를 타서 프랑스 파리에서 내리는 환상적인 열차 여행이 가능해집니다. 광할한 시베리아에 묻혀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도 러시아와 북한을 거쳐서 부산까지 파이프로 운송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외화를 쏟아부엇서 자원을 수입해야하는 우리 경제에는 엄청난 이득이 될 것입니다. 천연가스 파이프 통과룜만 받아도 북한재건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입니다.  경제 대국인 일본으로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비롯한 러시아산 자원들을ㄹ 실어 나른다면 부산은 세계적인 물류의 요충지가 될 것입니다.
북한에 거점 도시들은 굉장히 큰 경쟁력이 있습니다. 대외 경제정책 연구원이 북한 주요돗시 산업입지 경쟁력 지수를 산출한 결과 평양은 철도, 도로 인프라와 풍부한 노동력을 가지고 있고 남포는 중국이나 베트남 수준을 넘는 최고의 산업 입지를 갖췄다. 청진은 에너지와 항만이 잘 갖춰져 있고 해주는 토지와 숙련된 노동력이 많습니다. 함흥도 철도 도로가 비교적으로 괜찮습니다.
전문가들은 2조원 정도만 투입해 인프라를 보강하면 북한이 당장 베트남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는 나진항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결징이 없어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세계 5대 항구인 싱가포르조차도 향후. 나진항에 뒤쳐질 수 있다고 예측했습니다.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큰 손의 하나인 짐 로저스의 한마디는 통일 대박론을 요약합니다. "남북통합이 시작되면 내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


4. 일자리도 많이 창출이 될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은 북한은 복지도 필요한 땅이고 정보통신도 필요한 땅이고, 자영업도 필요한 땅이고 도로건설도 필요한 땅이고 그 외에도 북한재건하는데에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북한에 산업을 살리는데와 자원을 개발하는 데와 북한 산림을 다시 녹화시키는 데 등등 이런 데에도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자유통일은 우리 청년들에 많은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5. 이웃나라에게도 한반도에 통일은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우선 러시아의 경우는 현재 우랄 산맥의 동쪽 지역이 너무 낙후되어 있어서 그래서 푸틴 대통령은 극동개발부를 만들 정도에 만큼 러시아 우랄산맥 동쪽 지역개발에 부지런히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극동지역에는 도로도 많이 생기고 있고 그리고 2011년 그때 즈음에 에이팩 회담을 블라디보스톡에서 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에 루스키 섬에 회담장을 만들고 두 개의 아름다운 다리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공항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만약 자유통일이 된다면 러시아에 극동지역에 개발에도 더욱 가속도를 붙께 할 것이며 러시아 극동지역에 인구증가와 땅값도 올라갈 것입니다.
일본도 지금 현재는 북한에 미사일 때문에 공포심을 겪고 있지만 통일이 된다면 일본 국민들도 미사일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유통일은 이렇게 많은 좋은 이익이 있습니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이킨다면 자유통일로 가서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유대인을 복음으로 회복시키고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해서 주님 다시 오실 길을 예비하는 제사장 국가에 영적인 복과 그 외에도 제가 말한 6가지 등의 수많은 복을 받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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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교사들에 피와 땀이 서려있는 나라!, 그리고 기도로 시작한 나라!, 교회가 나라와 사회중심축이 되었던 나라! 대한민국!




한국에 복음과 최초의 접촉은 1626년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Janse Weltevree, 한국명 박연)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항해 도중 표류하여 경주에 상륙을 했다가 붙잡혀 한국 해군의 고급 장교가 되었습니다. 그의 개신교 신앙은 얼마나 돈독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복음이 최초로 한국민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그 뒤 26년 후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 졌으며,1816년에 영국 고함 알세스토(Alceste)호의 함장 맥스웰(Murray Maxwell)과 리라(Lyra)호의 함장 버질 홀(Basl Holl)과의 접촉에서 조대복(趙大福)에게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 후 독일 선교사 칼 구츠라프(Karl Gutzlaff) 목사가 1832년에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해 한국에까지 와서 항해도 장연 지역에서 통상을 요구하고 또 충청도 홍주만의 원산도에 정박하여 지방관을 통해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정부의 회신이 오기까지 원산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주기도문을 문답하고 한문성경을 배포했습니다. 결국 중국의 황제 허락 없이는 외국인들과 통상을 할 수 없다는 거절을 답으로 들은 구츠라프는 그의 항해기(7.27일자)에서 한국인들에게 구세주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그들의 구세주라는 것을 되풀이했으나 그들은 무관심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어떻든 한국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이 날이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미약한 첫 방문도 축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1865년 9월에 영국 선교사 토마스(Robert J. Thomas/런던선교회)는 1차로 월리암슨의 주선으로 항해도 장연 소래마을에 도착한 그는 서울까지 가려 했으나 도중 폭우로 인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1866년 무장한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을 거쳐 평양까지 와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1867년에는 토마스 선교사의 후원자인 월리암슨(Alexander Willamson) 등에 의하여 한국과 선교적인 접촉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교적인 문호가 개방이 된 것은 1882년 한미 수호조약 체결 후였습니다. 정식 국교가 성림이 되자 미국은 푸트(Lucius H. Foote) 장군을 초대 한국 주재 공사로 임명을 하였습니다. 한미 수교후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외교사절로 미국에 파견된 민영익은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에서 가우처(John F. Faucher) 목사를 만나 한국을 소개하고 만주에서 한국어 성경번역에 주력하고 있는 로스(Ross) 목사의 국내 성경반포에 협조하고 있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민영익과의 대화에 감명을 받은 가우처 목사는 곧 감리교 본부와 일본 주재 선교사 맥레이(Robert Samuel Maxlay)에게 한국답사를 부탁하고 기쁨으로 한국답사를 3개월간 가진 맥레이는 선교본부에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선교사역 착수를 희망하는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주효하여 1884년 9월 22일 알렌(Horace N. Allen) 의사가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교단의 선교사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감리교의 아펜젤러(Henry Gernart Appenzeller)였습니다. 이 두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함께 인천항에 상륙함으로 한국선교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었습니다.




의료선교 : 초기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주된 사역들은 직접 설교(preaching) 등에 의한 복음전파 방식과 함께 의료선교, 교육사업 등이었습니다. 1884년 7월의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사업에만 국한시켰습니다. 적극적인 선교활동은 조선 정부의 태도와 사회 전반의 보수적인 분위기로 어려웠으며, 그래서 초기 선교는 직접선교보다는 학교와 병원 사역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의료선교는 이러한 정황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습니다. 1883년 미국의 공사관의 설치, 1884년에 미국 공사관이 중심으로 서양인 의사를 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상해에 있던 알렌이 친구의 권유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알렌은 1884년 9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22일에 서울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때 알렌 자신은 미국 공사관 의사의 자격이지만, 미국의 북장로교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파견한 선교사의 자격이었습니다. 알렌이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이때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크게 부상을 입는데 서울 장안의 유명한 한의 14명이 흐르는 피도 멈추지 못하는데 거의 죽게 된 민영익을 알렌이 정성을 다해 3개월 만에 완쾌되었습니다. 이 일로 알렌은 고종 황제의 주치의가 되고, 정변때 죽은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하게 했고, 이 병원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입니다. 후에 고종은 이 병원을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습니다. 제중원이 개원되면서 1885년 의료선교사로 입국한 미 감리교 스크랜톤, 장로교의 헤론이 외래환자를 진료하였습니다.1887년 개조해서 쓰던 홍영식의 집을 미 북장로교에서 구리개로 옮겨 진료를 하였고, 그 후 1894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의 실업가인 세브란스(L.H.Severrance)가 거금을 희사함으로 남대문 밖 지금의 서울역 앞에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현대식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브란스 병원인 것입니다.

   의료선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치료소는 환자들로 가득했으며, 알렌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언더우드가 와서 약국 일을 도와주고 헤론과 스크랜톤이 가담을 했으나 모자라는 약품과 의료재료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1885년 제중원에서 진료하던 스크랜톤이 9월에 나가서 정동에서 민간인 진료소를 개원하고 이 병원의 간판을 “시병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병원을 통하여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1886년 미 북장로교의 여자 의사인 엘라즈(A.Ellers)가 입국하여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녀자들을 돌보고 치료하였습니다. 그 뒤 여자들만의 병원도 생겨나게 되는데, 1887년 10월에 하워드(Howard)가 내한하여 시병원에서 일하다가 1888년 정동에 여자들만을 위한 병원을 세워 “보구여관


 “(保救女館)이라 칭하고 여성들의 치료에 전념하게 됩니다. 이러한 치료소는 서울에 여러 개가 개설되고 지방에도 병원이 늘어나는데 이것이 선교기지로서 역할이 막중하였습니다.





 ● 교육선교 :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알렌이 공식적인 신분이 의사였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사였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의료와 교육은 전초작업의 두 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의료가 질병에 걸린 사람을 상대한다면 교육은 배우지 못한 어른들과 어린이들을 포괄하는 큰 밭이기도 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에서 진료를 맡으면서 1885년 말에 2,3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었습니다. 어떻든 맨 먼저 학교의 형태로 교육을 시작한 것은 언더우드였습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들을 모아 수용함으로서 자연히 고아원이 되었습니다.1886년 2월에 정부의 허가를 얻어 조그마한 집에서 시작을 했고, 언더우드는 이 고아원이 앞으로 대학과 신학교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고 그의 친구 헐버트에게 술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전하면서 “언더우드 학당”,“예수교 학당”,“민노아 학당” 등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마지막에는 오늘의 경신 중․고등학교의 전신이 경신학교(1905)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은 “네비우스”정책을 채택하면서 일단 문을 닫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일하는 실업학교로 변하게 됩니다.

    감리교의 아펜젤러도 1886년 6월 8일 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근대 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의 시작입니다. 이 학교가 문을 열자 불과 5개월 만에 32명의 학생들이 몰려 들어왔고 이들의 관심은 종교보다는 영어를 하여 출세하려는 현실적인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선교사들의 예배를 참여하면서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 여자 학교도 시작이 되었습니다.1886년 5월 31일에 메리 스크랜튼부인에 의해 이화학당(梨花學堂),1887년 6월 엘리즈에 의해 시작된 정동여학당이었습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도 선교부와 지역교인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늘어났다. 대표적인 지방의 기독교 학교는 다음과 같습니다. 평양/숭실학교(1894,북장), 숭의여학교(1903,북장), 광성학교(1894,미감), 정의여학교(1899,미감), 대구/ 계성학교(1906,북장), 신명여학교(1903,북장), 광주/숭일학교(1907,남장), 수피아여학교(1908,남장) 등이었습다.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의료와 교육선교로 인해 상당히 사라지게 되었지만 간혹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 의견차이가(알렌은 이런 정황에서 바로 전도행위를 한다는 것은 경거망동한 몰지각한 행동으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언더우드 등은 입국즉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직접 지방전도에 나섰습니다)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준비와 이들의 노력으로 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 한국의 개신교 성도는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종순일 목사의 ‘빚 탕감 잔치’


                                                   이덕주(감신대 교수/ 한국교회사)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해방 전만 해도 세례 받은 기념으로 뭔가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기념으로 교회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거나 예배당 마당에 나무를 심기도 했다. 세례를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하여 이를 기념하는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선교 초기에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이 있었다. 개신교회는 그 전통을 버렸지만 천주교회나 정교회, 성공회 같은 ‘가톨릭’ 전통의 교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인(聖人)의 이름을 따 ‘프란체스코’, ‘베로니카’, ‘베네딕또’, ‘마리아’ 같은 서양식 이름으로  ‘본명’(세례명)을 지어 받았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으로 이름을 바꾼 개신교인들이 있다. 강화도 북부 해안 마을, 홍의에서 처음 믿은 교인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예수 믿고 이름을 바꾼 사람들


 홍의 마을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1897년 어간이다. 이 마을 서당 훈장이 이웃 서사면 다리목(지금 교산) 마을에서 복음을 접하고 돌아와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서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오늘 홍의교회 출발이다. 훈장의 전도를 받고 믿기로 결심한 홍의 마을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면서 개명(改名)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거듭난 증거다.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새 이름을 지어주듯 우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름을 새로 짓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신생(新生)과 중생(重生)의 표시로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돌림자를 쓰기로 하였다.

 “우리가 마을에서 처음 믿었고, 한 날 한 시에, 함께 믿어, 한 형제가 되었으니 한 일(一) 자로 돌림자를 쓰자.”

 성은 부모님이 준 것이라 바꿀 수 없었고,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한 일자로 통일하였으니 가운데 자만 정하면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애’(愛), ‘신’(信), ‘능’(能), ‘순’(純), ‘충’(忠), ‘봉’(奉), ‘은’(恩), ‘경’(敬) 같은 자를 적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기도한 후에 하나씩 뽑았다. ‘애’ 자가 뽑히면 ‘애일’, ‘신’ 자가 뽑히면 ‘신일’, ‘경’ 자가 뽑히면 ‘경일’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홍의 마을에 처음 복음을 전한 훈장은 박능일(朴能一)이 되었고 김경일(金敬一), 권신일(權信一), 장양일(張良一), 주광일(朱光一) 같은 홍의 교회 개척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쓰는 명칭만 바꾼 것이 아니라 호적과 족보까지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같은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삼촌과 조카가 같은 날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외는 없었다.

 “육적으로는 부모지간, 숙질지간이지만 영적으로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같은 돌림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

 그 결과 부자간, 숙질간에 같은 돌림자를 쓰게 되었다. 권신일의 아들은 권충일(權忠一), 조카는 권혜일(權惠一)이 되었고 정천일(鄭天一)의 아들은 정서일(鄭瑞一), 김봉일(金奉一)의 아들은 김환일(金還一)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돌림자는 친족 간의 촌수와 항렬을 알려주는 단서였다. 상하간의 서열이 분명하여 ‘윗대’의 돌림자를 ‘아랫대’에서 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질서가 교회에서 깨졌다.

 이처럼 파격적으로 이름을 바꾼 교인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절도, 촌수를 모르는 상것들이라”며 “검정개”(그 때 교인들은 검은 옷을 입고 다녔다)라고 조롱했지만 ‘육적 질서’ 대신 ‘영적 질서’를 따르기로 한 교인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홍의 마을에서 시작된 개명 전통은 강화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선교 초기 ‘일’자 돌림으로 개명한 강화 일대 교인들은 60여명에 달한다. 이들 개명한 교인들은 이름을 바꾼 만큼 신앙에서도 철저하였다. 홍의교회 개척 교인 종순일(種純一)이 대표적이다.


 마을 빚을 탕감해준 부자 교인


 종순일은 예수 믿기 전 ‘마을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물에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 가운데 그에게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세례 받고 이름을 바꾼 그는 교회 속장이 되어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 말씀을 읽었다. 1만 달란트 빚진 신하가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후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임금이 화가 나서 빚 탕감을 취소하고 그 신하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구절을 읽은 종순일은 며칠 고민하다가 자기에게 돈 빌려 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자신이 읽은 마태복음 말씀을 들려주었다.

 “오늘 내가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은 것이 천만 냥 빚 탕감 받은 것보다 크거늘, 여러분에게 백 냥, 천 냥 돈 빌려주고 그걸 받으려 한다면 이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악한 종이라 할 것이요. 이 시간 후로 여러분이 갚을 빚은 없소.”

 그는 문갑에서 빚 문서들을 꺼내 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앴다. 행여나 빚 독촉을 받는 것인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왔던 마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요즘 없는 빚도 있다고 우겨서 남의 돈을 빼앗는 세상인데 어찌하여 예수교 하는 사람은 자기 돈까지 버려 남을 도우니 참 갸륵한 일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홍의 마을의 복음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00년 4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종순일은 ‘부자 청년’에 대한 말씀(마태 19:16-30)을 읽은 후 자기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교회에 기부하였다. 그리고는 부인과 함께 고향을 떠나 전도 길에 나섰다. 종순일은 전대도, 식량 주머니도 차지 않은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남이 가지 않는 ‘땅 끝’(행 1:7)을 찾아 전도하였다.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강화 남부 길상면으로 가서 전도한 결과 길직, 길촌, 온수, 선두, 넙성, 덕진 등지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나서 석모도와 주문도, 영종도 같이 교통이 불편한 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목회하였다.

      

재현된 빚 탕감 잔치


 종순일은 1917년 감리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강화 남쪽 주문도 진촌교회(현 서도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주문도에는 1893년 성공회 신부가 와서 복음을 처음 전했고 1902년 김근영 전도사가 와서 감리교회를 설립했는데, 주문도를 호령하던 ‘밀양 박씨 충헌공파’ 집안의 박두병 ․ 박순병 형제가 교회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런 진촌교회에 박두병 ․ 박순병과 같은 집안사람으로 아버지가 박두병에게 ‘2천원’(현 시가로 1억 원 정도) 빚을 진 채 별세하여 그 빚을 고스란히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난한 교인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쓸 것을 쓰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절약하여 16원을 모았으니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가도 갚을 수 없을 것은 분명했다. 그가 하루는 교회 목사와 박두병 ․ 박순병을 비롯한 박씨 문중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여러 어르신, 아버님께서 지신 빚을 갚기 위해 8년 동안 애써 모았으나 16원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제가 죽기 전에 빚을 다 갚지 못하게 될뿐더러 빚 때문에 도무지 제 맘이 편치 못하여 기도도 할 수 없으니 어찌 하면 좋습니까? 여러 어르신의 처분을 따르겠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20절 이하 말씀을 읽고 나서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과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고도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지 않은 신하가 받은 형벌’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동생 박순병이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문제가 난 것도 하나님의 뜻인 듯 합니다. 형님은 그 돈을 받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받아야겠다는 형님 마음과 갚아야 된다는 저 사람의 근심이 서로 다르니 어찌 합심하여 기도가 되겠습니까? 기도 할 때 서로 거리낌이 없어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박두병이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그럼세. 그렇게 함세. 자네 부친이 내게 진 빚은 아니 갚아도 되네.”

 박순병이 다시 이어 받았다.

 “형님이 2천원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저 사람 부친이 내게 진 빚 60원을 어찌 받겠소? 나도 그 빚을 탕감해 주렵니다.”

 아버지 빚을 물려받았던 가난한 교인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 감동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주문도 섬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오래지 않아 당시 섬 주민 181호 가운데 134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으니 전 주민의 75%가 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도 면소재지인 주문도가 ‘술집과 다방이 없는’ 성역(聖域)으로 남게 된 데는 이러한 감동적인 복음 역사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런 감동의 연극을 연출한 장본인은 종순일 목사였다. 그는 17년 전 고향(홍의)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연극을 이제 목회자가 되어 주문도에서 재현한 것이다. 그 때 ‘빚잔치’ 주연배우였던 그가 지금 같은 내용의 ‘빚잔치’ 연극의 연출자가 되었다. 17년 전의 감동이 장소만 바꾸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은혜는 은혜를 낳는 법이다. 그런 그에게 ‘성자’ 목사 칭호가 붙여진 것은 당연하다.

 부요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으나 예수를 믿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마을 빚을 탕감해 주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전도자가 되어 ‘땅 끝’을 찾아 복음을 전하는데 일생을 바친 종순일 목사는 1926년 목회 일선에서 은퇴한 후 주문도에서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 별세하였다.

서서평 선교사 이야기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 기념사업 경과보고를 하던 양국주(63) 씨가 잠시 울먹였다. 17일 광주광역시 양림동 기독간호대학 안 오웬기념각.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회’에 모인 1000여명의 사람이 여기저기서 함께 눈가를 훔쳤다.

독일 출신 미국인인 서서평 선교사는 1912년 32살의 나이에 처음 조선에 온 처녀 간호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은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 제 백성 돌볼 엄두도 못 내던 나라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병고에 시달리는 몸으로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를 끊임없이 순회하며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을 가르쳤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평양대부흥운동

한국의 오순절 그 역사적 발단 한국에는 세 차례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에 백만인구령운동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부흥운동이 세 번이나 일어난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인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라는 여자선교사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한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1890년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한 하디는 가는 곳마다 선교를 실패했는데 그 원인을 한국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다가 기도회 강의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문제라 생각했습니다. 그가 만난 성경은 누가복음 11장 13절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가 눈물로 며칠 동안 하나님과 만난 이후 시작한 강의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디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하디의 회개를 통해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하디의 회개는 동료 선교사들한테도 은혜를 끼쳤습니다. 업아력(A. F. Robb) 선교사가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새롭게 거듭났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도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변화되자 원산 부흥운동의 저변이 확대 되었습니다. 하디는 자신을 부흥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자신에게 실패감을 안겨주었던 강원도 지경터로 향했습니다. 그가 인도한 12일의 지경터 집회 동안 성령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디는 이어 개성, 서울로 향했습니다. 주님은 예외 없이 이곳 집회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부흥의 열기에 힘입어 1904년 6월에 들어 처음으로 부흥회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은 ‘기성신자는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불신자는 주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디는 안식년을 떠나기 전 10월에 서울과 제물포와 평양 세 곳에서 집회를 인도했고 이들 집회 가운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하디가 안식년을 떠난 후 1905년에 접어들어 개성을 중심으로 영적각성이 계속되었습니다. 1905년 9월 장로교 4개 선교회와 감리교 2개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함께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를 조직하고 하나의 민족교회를 꿈꾸며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 영적부흥이라고 확신하고 1906년 신년 들어 신년부흥회를 전국적으로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의 모든 선교사가 모여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를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이길함 선교사를 비롯해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이르기까지 온 회중들은 하디의 설교를 통해 큰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존 스톤을 강사로 모시고 이어 열린 서울선교사 사경회에서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웨일즈와 인도 부흥운동의 현장을 목도하고 한국을 방문한 존 스톤은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놀라운 부흥운동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존 스톤은 서울 사경회가 끝난 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경회를 인도하며 다시 한 번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운동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부흥을 기대하며  이런 영적분위기 속에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안남도 전역에서 올라온 1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렸습니다. 6일부터 저녁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평양시내 사람들은 낮 집회에 참석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저녁집회에는 참석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평양대부흥운동은 사경회 기간, 특별히 사경회 마지막 14일과 15일 이틀 동안에 발흥했습니다. 평양의 오순절 그 첫째 날 (1월 14일 월요일 저녁), 통성기도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다 돌려보내고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로 평가받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바로 그 때 모인 남은 자 600명 가운데 임했습니다. 회개를 동반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모인 이들 모두 처음 체험하는 강력한 부흥이었습니다. 평양의 오순절 둘째 날인 1월 15일, 선교사들은 정오에 모여 어제 있었던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때 선교사들 가운데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이날 말씀을 전하는 길선주의 얼굴은 거룩함으로 불타고 있었고, 그의 메시지를 들은 동료 장로의 증언을 빌린다면 그의 얼굴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고 합니다. 그가 회개할 것을 촉구하자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 안에 은밀하게 숨겨진 온갖 죄악들을 다 토로했습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공개적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평양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경회 이후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도 회개를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장대현교회는 사경회가 끝났는데도 16일 수요일 기도회 때, 다시 20일 주일 예배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일제시대때 한국교회의 독립운동













밑에 사진은 이상재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고 난 후 심문 받을 때 "이 운동에 선동자는 만군의 하나님이시오"라고 증언한 자료입니다.

일제시대때 3.1운동 당시 33명 대표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기독교인 대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신석구, 이승훈, 길선주 이 분들이었으며 그리고 유관순 누나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석구 :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교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 조만식 선생이 1913년에 교사로 부임하였고, 1915년 33세에 교장으로 취임되었던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모습입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선립된 학교인데요.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였지만 조만식 선생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학교를 더욱 성장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당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강서군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다음 해 1월에 출옥하였고, 이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지만 일본관헌의 불인가로 다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http://mpva.tistory.com/2104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각에도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 하나님 믿는 성도들이 참여 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법 전문 내용 사진입니다. 위에 나온 것처럼 "신인일치"라고 나와 있습니다.

중국에서 광복군 조직 노력과 윤봉길 의사 의거를 도와주고, 이봉창 선생 의거를 도와주었던 김구선 생 역시 "경찰보다 10개보다 교회 1곳 신설이 더 효과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제시대때 한국교회는 독립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교회는 일본에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 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손양원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조만식 장로님 처럼 신사참배를 반대하신 분도 있습니다. 1945년 하나님께서 놀라운 광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건국 자체도 정말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신비중의 신비입니다.


대한민국 건국은 하나님에 은혜로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주변국 중국, 일본, 그리고 북한 등이 모두 공산정권 이었지만 대한민국은 정말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되었습니다. 이것!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에 축복입니다.


대한민국은 기도로 세워진 나라이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국회 부의장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다 성심(誠心)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올린 기도는 국회 속기록 제1면에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이윤영 목사가 드린 '하나님께 드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문'으로 국회 속기록에 있는 내용이다.

 

  "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는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南北統一)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民生)의 복락(福樂)과 아울러 세계 평화(世界平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 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서 우리의 완전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시작된 이 기도는 세가지를 구했다. 

민생의 복락과 남북통일, 그리고 세계평화.

 

민생의 복락은 이루어졌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이제는 경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남북통일로 선진 한국을 이루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 건국의 아버지들의 염원이자 대한민국의 역사적 사명이고, 우리와 후대가 대대로 행복해지는 길이다.

북한 주민을 압제와 굶주림에서 해방시키는 남북통일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숙제이고, 민족상생(相生)과 도약의 길이다.



위에 내용처럼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취임 선서에서 헌법 수호 대통령 책무에 충실할 것을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 대한민국을 탄생시켜주신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앞에서 맹세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 정책들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를 발족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조석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했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으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의 모범을 보인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형해(形骸)화 시키면서 기독교의 교세 신장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특혜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조치를 취했다.

  (1)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는 관례를 세웠다.
  (2)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꾸었다.
  (3) 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도입함으로써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기독교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形牧制度)를 도입해 옥중의 죄수들에게 기독교 전도의 문을 열었다.
  (4) 정부 요직에 기독교 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장려했다. (정부 요직의 약 40% ; 국회의원 중 약 25%)
  (5) 기독교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M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했다.
  (6) 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당시와 그 후 외국(특히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개별교회와 교역자들 그    리고 신학교 등에 배분토록 조처했다.
해방 전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그 수가 1950년에 이르러 60만명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114만명이 됐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업적은 밑에 나온 것처럼 이렇습니다.


최초의 우리나라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 1898년에 창간되었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은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었다. 사장에는 양홍묵, 기재원(記載員:지금의 기자)에 이승만, 최정식, 회계에 유영석 등이 참여하였다.

그 이후에 이승만은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었다.

2. 미국 유니버시티 프레스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을 출간(프린스턴대 박사학위 논문)



- 이승만은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d)>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는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의 국제법상에서의 전시중립을 다룬 것이었는데,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이었으며, 부전공은 미국 역사와 서양사였다.

그의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이는 높은 학문적 평가를 받은 것을 입증한 것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였다. 이로 인해서 이미 미국에서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정치학자가 되었다.

3. 미국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 



- 1914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기숙사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서 이곳으로 와서 공부하던 여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한 것이 그 모체가 되었다. 다음해에 대한인국민회의 지원으로 3에이커의 토지를 구입, 교실을 건축하였으며, 기숙사도 새로 마련하였다.

1916년 3월 1일에는 기숙사명칭을 한인여자성경학원(韓人女子聖經學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으며, 이 과정에서 3만달러의 건축비 결손이 나자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을 결성, 조국에 파견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4. 곧 독립할 것이라며 무국적을 선택(중국, 미국 국적을 가졌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 해외에 있던 당시 대부분의 주요 독립운동가들은 편의상 중국 국적이나 미국 국적을 가졌는데, 이승만은 끝까지 중국 국적도, 친미파였음에도 미국 국적도 갖지 않고 무국적자 망명객 신분으로 살았다. 예컨대 김구는 대표적인 중국 국적 독립운동가였고, 안창호와 서재필의 경우 대표적인 미국 국적 독립운동가였다.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 밖으로 나갈 때마다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고, 그때마다 미국 국적 취득을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한국이 곧 독립될 것이므로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고는 했다.

5.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요청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 



-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임시정부 자체에서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3대 독립운동 노선에서 박용만이 무력투쟁론, 안창호가 실력양성론이었다면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의 축에 속했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예컨대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자 중경 임시정부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독려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비로소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독립을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요청했다. 중경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일본선전포고를 하였다.

6. <일본내막기>라는 책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미국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일본의 미국 침공을 이미 3년 전에 예견 



- 이승만은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미국에 출간했는데, 이 책은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는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누차 강조를 하는 이승만의 책은 그 이후에 미국에서 불티가 나게 팔려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내는 기념을 토했다.

이미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이전인 1939년 11월쯤부터 집필에 몰두한 끝에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이승만이 출간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고 높이 평가를 받는다. 사실, 출간 당시 미국에서는 오히려 혹평이 쏟아졌었던 책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경고대로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서는 연일 그의 선견지명이 이슈가 되면서 그 책은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데에 큰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되었다.

7. 외교독립론을 통해 카이로 선언문(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줌



- 외교독립론을 통해 이승만은 미 상원 부속교회 목사인 프리드릭 브라운 해미스 같은 거물급 감리교 지도자들을 통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미국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결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최측근인 독실한 감리교도인 해리 홉킨스가 작성한 원고를 영국 대표가 약간 수정함으로써 나온 것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카이로 선언문은 덕분에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논의하고, 또 인정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이 "한국인들의 노예상태를 유념하여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반길 때 이승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의구심을 품었다.

즉,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절차'라는 문귀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미 국무부에 서한을 보내기도 하고, 또 성명서를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이 걱정했던 이 논란이 된 문구는 훗날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8. 미국 OSS의 굿펠로우 부장과 협력, 국내진공작전인 김구의 독수리 작전과 소수정예를 공수부대처럼 침투시키는 냅코계획을 성사시킴



- 이승만은 흔히 외교독립론자로 무장투쟁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했다. 무장투쟁이 중경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대해 재미한인들로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에 대한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쓴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에쓴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반과 2인자인 프레스톤 굿펠로우와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이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대체로 1945년 4, 5월께 실천단계에 들어간 이들 계획에는 김우전(현 광복회 회장)과 유일한(유한양행 창업자) 등도 참여했다.

9.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북한의 공산화를 저지 



-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1946년 6월 3일에 했던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한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최근까지도 그가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소련의 극동문서고들에서 여러 문서들이 개방됨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안목은 오히려 현실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컨대 이미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가지기 이전인 1945년 9월 20일부터 북한에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으며, 그것은 1945년 10월 초순부터 노골화되어 1946년 초에는 실제로 실질적인 기반을 거의 구축했다. 정확히 따져보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의 덕수궁에서 열렸는데, 이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로 알려졌다.

하지만 훗날 이 미소공동위원회의 목적은 애초에 소련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미국과 이승만임을 국민들에게 각인을 시켜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보다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소련군 대표 스티코프는 한반도에 적대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를 본다면, 스탈린은 서구열강과 가진 협상에서 동유럽의 정치적 자율권, 즉 민중들의 선택에 따른 결정을 허용한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은 협상을 깨고, 동유럽 국가들에 있었던 민주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는 이를 통해 소련의 공산주의만을 위한 정부를 수립했다.

10.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음



-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는데, 여러 논의를 거쳐 대한민국의 최초 헌법이 탄생하였다. 이 헌법을 통해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군주제가 아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국민들은 대부분의 근대 국가가 보호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인 자유, 평등, 재산, 교육권 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본적인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주요 자원이나 산업에 대한 국유 내지 국, 공영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또한 경제 사회적 민주주의의 요소도 혼합하여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과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도 인정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민당이 추대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만든 한민당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자 한민당은 야당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시켜 여당을 형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당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호했음에도 처음에는 (물론, 측근들의 반대로 무마되고 자유당이 되었지만) 노동당을 생각했을 정도로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자 했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은 우리가 현재에도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와 기초를 쌓았다고 할 수 있겠다.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확립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자주성을 부여하고 생산력을 증가



-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아주 중요했다. 예전에 우리나라보다 잘 살았던 국가로 인식되는 필리핀의 경우, 토지개혁이 실행되지 못해서 지주층이 사회상류층으로 그대로 존속하게 되어 지금과 같은 가난한 국가가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파키스탄 또한 아직 봉건적 잔재가 많아서 제대로 발전이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과 같이 선진국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 기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고 그의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자본주의를 살리는 개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은 농민과 사업가를 구해 신생 대한민국 경제 건설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화를 막으려면 토지개혁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관계 장관들에게 입버릇처럼 채근하곤 했다.

실제로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간발의 차이로 거의 토지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덕분에 농민들이 6.25전쟁 도중 북한이 점령한 우리나라 땅에서 토지개혁 선전에 농민들은 현혹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농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대거 이탈하지 않았고, 또 당시에는 농민의 국가로 알려진 공산주의 국가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고 대한민국을 지킨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행된 '농지개혁에 대한 임시조치법'은 그야말로 민주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조치법은 지주의 삶을 보장하면서도 농민에겐 자신의 토지를, 사업가에게는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 경제건설 기회를 준 일거삼득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한민당에 포진한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을 견제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군최고통수권자로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임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이승만 대통령은 전적으로 지원을 받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주고 있는 미국에게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또한 그는 유엔군의 원활한 지휘를 위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하였으면서도, 반공포로 석방 등 그때그때의 전황에 따라 전쟁지도를 융통성 있게 실시했다.

그는 친미로만 일관을 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이익을 위해 처신하고 행동했다. 또한 그의 위기시 전쟁지도력이 매우 뛰어나 밴 플리트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는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칭찬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당시에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다했다. 예컨대 그는 80세를 바라보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매주 전선시찰을 통해 장병들을 격려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실제로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자신이 재임했던 2년에서 평균 1주일에 1번씩은 꼭 함께 전방과 훈련지역을 빠지지 않고 시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는 폭염이나 혹서 등 계절이나 기후와 관계없이 전선지역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한 번은 낙동강전선의 최대 위기인 영천 전투가 끝날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이 영천의 국군8사단을 격려했는데, 주변에는 적의 박격포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또 그는 1952년 10월에 중부전선 철원지역에서 백마고지를 두고 중공군과 혈전을 벌이던 국군9사단을 방문하여 격려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에 중동부전선의 최대 격전지인 단장의 능선 전투를 앞둔 장병들을 격려하고자 부산에서 강원 양구지역의 펀치볼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최전선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는 국군과 미국 장성들의 절대적인 충성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15. 6.25전쟁 중에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자 독도를 지키는 평화선인 '이승만 라인' 선포



- 6.25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경계선을 표시하여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으로 점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화선은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에 달하며, 이 수역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이었다.

어업기술이 월등한 일본과의 어업분쟁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고 공산세력의 연안침투방지는 물론, 세계각국의 영해확장과 주권적 전관화 추세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적인 배려에서 선언되었다. 평화선이 선포되자 처음에는 일본어선의 침범조업이 적었으나, 몇 개월 후 다시 급증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18일 선포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6. 6.25전쟁 중 미군에 의한 일본군과 대만군의 국내주둔 및 지원의사를 완강히 거부



- 1951년 1월 4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자, 미군 수뇌부는 유엔군에 일본군을 비롯한 대만군의 편입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알게 되었고, 대노했다. 1951년 1월 12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수뇌부에게 "만일 일본군이 참전한다면 국군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돌려 일본군부터 격퇴한 다음에 공산군과 싸울 것"이라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또한 장개석의 자유중국군의 지원에 대해서도 "한국전선에 일본군을 끌어들일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우려는 과거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과거 조선의 조정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청나라군을 끌어들였다가, 청나라군의 개입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톈진조약에 근거하여 개입하였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에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그 일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일본군이 승리하여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군에 의해 밀리는 상황에서도 일본군과 대만군의 개입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결국 미군도 이 계획을 포기했다.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



- 반공포로석방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적인 면모를 세계에 과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남한의 모든 사람들은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이승만도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은 휴전협정에서 한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북한과 대신 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다. 즉, 우리나라의 의사결정권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하나의 자주적인 독립국임을 과시함과 동시에 반공포로들을 생각해서 독단적으로 석방을 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 등 자유우방국과 공산권 국가들은 이제까지 공을 들여 온 휴전이 백지화가 될까봐 우려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용덕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그들을 석방하라는 친필명령서를 직접 전달했고, 1953년 6월 18일 0시에 개시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국군은 아군인 미군을 제압한 이후에 27,000명을 석방시키고 그들을 남한의 국민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는 이 반공포로석방으로 외교적 성과를 얻고 자주적인 면모를 과시하게 되었다. 또한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조건부 성과를 미국으로부터 얻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국군의 발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성사


- 6.25전쟁 직후 국군은 크게 발전했다. 예컨대 해군은 전쟁 당시에 4개 정대에 33척의 함정으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휴전 무렵 해군은 6개의 전대를 기간으로 한 1개의 함대를 창설했고, 병력도 6,954명에서 12,000명 수준으로 증강됐다. 공군도 1개의 전투비행단과 1개의 훈련비행단 등 2개의 비행단으로 성장했고, 비행기도 F-51전투기 80대를 포함하여 총 11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병력도 1,897명에서 11,000명으로 증원됐다. 이는 전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었던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어 낸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앞서 언급된 반공포로석방을 통해 미국에게 자주적인 권리를 천명했고, 또 자신들이 휴전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미국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조약을 이승만이 체결하도록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어 확실한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아냈다. 즉, 미군을 서울 북방의 서부전선에 배치하여 일종의 인계철선 역할을 하여 북한군이 다시 남침을 한다면 자동개입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으로부터 추가로 전후에 7억불의 차관을 얻어냈다.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등을 준공하여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충주비료공장과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준공하였다. 그럼으로써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핵심적인 사업이 된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예컨대 당시에 중공업은 북한이 79%, 남한이 21%의 비율로 매우 비대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고, 금속 공업의 경우엔 90% 이상이 북한에서 생산되었다. 남한에서는 오로지 방직공업 생산 부문에서만 북한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나라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1956년부터 수입대체산업 정책이 본격화가 되었다. 이를 통해 국내 산업시설의 육성을 위한 기반, 즉 박정희 정권 때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지원금을 모두 문경시멘트공장, 충주비료공장, 인천유리공장 등의 발전사업 건설에 사용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밑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안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격차가 현격한 일본과의 국교재개를 초기에 반대함으로써 그후 일본경제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그 이후인 박정희 정권에는 어느 정도의 구축을 해놓은 상태에서 국교를 재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 종속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으로 그가 통치한 1953년에서 1960년 사이에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또한 제조업 성장률은 12.4%였다.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원조자금을 착복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국가의 토대를 건설했고, 또 이러한 사회기반설비와 교육으로 만든 인적 인프라는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기에 아주 중요한 업적이라 하겠다.

21.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세계적인 원자력 국가의 토대를 닦음



-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연구소인 원자력 연구소는 국민소득이 겨우 80불이던 당시 원자력 연구에 적극적 지원을 하여 발전을 시켰는데,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은 세계 6위로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춥고 배고픈 시절인 만큼 에너지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여 미국이 발전 군함을 부산 항에 정박시켜 전기를 공급했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발전 설비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 원자력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원자력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냈고 이들이 귀국할 무렵부터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를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8년 원자력법을 제정하였고, 1959년 1월 21일 장관급 부처인 원자력원을 설립했다. 또한 3월 1일 원자력 연구소(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원)를 세웠다. 같은 해 7월 14일 이 연구소 안에 미국에서 들여올 연구용 원자로 ‘트리카 마크Ⅱ’를 설치하기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현재 미국이 103기, 프랑스 59기, 일본 54기, 그리고 러시아 30기, 독일 17기에 이어 우리나라가 4곳에 20기로 그 다음이다(설비용량 기준). 세계 최초 원자력 발전소는 1956년 영국에서 가동됐고, 현재 세계 31개국에서 443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러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원자력 발전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 토대를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 1953년 인하공과대학을 설립해 문과를 강조하던 전통을 바꾸어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설립



- 6.25전쟁이 끝난 이후인 1954년에 우리나라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발의로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되었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은 하와이 교포 2세 교육을 위하여 1914년 이승만이 설립·운영하였던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대금,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국내 유지의 성금 및 국고 보조 등의 기금으로 충당하고,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에 우리나라가 강조하던 문과쪽에서 탈피하여, 앞으로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인재들인 공학도들을 기르고자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과거 조선에 얽매인 대한민국의 구습타파를 통한 정신혁명과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이 사업이 이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기념사업으로 출범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인하'라는 대학의 명칭도 '인천의 하와이'라는 뜻으로 정했다. 그 결과, 인하대학교는 현재 대학개혁, 교육 인프라 구축, 세계화 등을 높이 평가 받아 2004년과 2006년 <중앙일보>에서 실시한 국내대학평가에서 9위를 기록하였다. 또 2010년 <조선일보>-QS 아시아대학평가에서 83위, QS 세계대학평가에서는 443위를 기록하였다.

미국의 로드아일랜드 대학과 워싱턴 대학, 중국의 난징 대학[南京大学] 대학, 일본의 와세다 대학[早稲田大学] 등 7개국 8개 대학이 ‘글로벌 U8 컨소시엄’을 결성하여 학생교류, 커리큘럼 공동개발, 교수교류 등 활발한 인적 교환 및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적인 공과대학으로 발돋움을 하고 있다.

23.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대학도 19개에서 68개,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또 문맹퇴치운동을 통해 1948년 문맹률 80퍼센트에서 1959년 22.1퍼센트로 줄임



- 1950년대에 정부 예산을 살펴보면 그 중 절반가량이 국방비로 지출되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 예산을 약 20% 정도로 유지하는 과감한 예산 운영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교육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이승만의 강력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예산을 바탕으로 교육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나갔다. 

그 자신이 상당한 고학력의 인텔리였기 때문의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다. 그 결과 전후 의무교육을 실시해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10년도 되지 않아 신설되어 136만에서 360만으로 증가했고, 1945년 80%가 넘던 13세 이상 문맹률이 1959년에 가서는 15~20%까지 낮아졌으며, 초등학교 취학률은 1946년 53.4%에서 1958년에는 95.2%의 완전 취학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며 초등교육 의무화를 이루어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8~1960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률이 4배 이상 오르고 대학의 수도 19개에서 68개로 급증하면서, 이승만 정권 말에는 대학진학률이 당시 제 2의 경제대국이었던 영국보다도 높은 수준을 달성하는 등 기적 같은 모습을 연출했고 당시 인구 5천만이던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는 규모의 대학생 수를 자랑했다.

예컨대 대학생은 8천명에서 10만명으로 대폭 늘어났으며,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 대학교는 12배로 늘어났다. 현재 일반적으로 국내외, 그리고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의 체계와 기초를 다진 인물을 공통적으로 모두 이승만 대통령으로 꼽고 있다.


장면 내각과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의 토대가 된 이승만의 경제개발 3개년 계획


- 1957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대외정책은 군사우선에서 경제중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련과 중국, 북한이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함에 따라 그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모델로서 부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방국들에 대한 지원을 하고자 했고, 우리나라도 해당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정세를 이승만 대통령은 꿰뚫고 재정안정계획과 장기경제개발계획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정부가 가급적 많은 부분을 국방비에 쓰기를 강력하게 권했으며, 그 결과 1954년부터 1960년 사이에 우리나라는 지출액의 34.8%를 국방비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20%정도를 교육에 투자했던 것이다.

미국은 우리나라가 독립적으로 발전을 꾀하기보다 일본과 공조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과 교류를 하길 꺼려했고, 최우선과제를 경제안정이 아니라 경제재건과 부흥으로 삼았다. 원조재원을 사회기반설비와 생산재 산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조속한 시일 내에 한국 경제를 재건하고 자립시키자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개발계획은 1953년 3월 전쟁 중에 발표된 UNKRA(국제연합한국부흥단)의 네이산 보고서(한국경제재건 5개년 계획)가 그 시작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 이승만 정부 관료들의 이의가 많았고, 또한 단지 지침서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장 시행되거나 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 안이 제기된 것은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면서부터다. 이곳엔 EDI(세계은행 산하의 경제개발연구원)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우수 인재들과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기예들을 대거 기용했는데, 이중에선 현재 많은 나이에도 불구 효성그룹의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송인상 씨가 유명하다.

송인상 씨는 EDI 연수를 다녀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흥부장관 자리에 기용되는데, 그는 그러면서 후진 개발도상국에서는 정부 주도하의 강력한 경제개발계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마샬 플랜 입안자로 유명했던 미 국무부 차관인 크리스천 히터를 방문 설득하면서 미국 원조자금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할 것을 약속받아냈다.

미국과의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58년에 드디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립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계획경제개발의 시동을 걸게 된다. 다만, 초기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산업계획 모델을 작성하기 위해선 수많은 통계자료와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에는 이런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많은 조사를 필요로 했는데, 이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산업개발위원회 위원들에게 월급을 장관보다 4배를 더 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가며 각고의 노력을 기했으며, 이러한 조사는 1960년 초에 가서야 끝나게 된다. 수많은 노력이 있는 끝에 1960년 4월 15일에 드디어 처음으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발표되고 의회를 통과하면서 경제개발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는데, 4일 뒤 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계획개발은 백지화되었는데, 다만 다행인 것은 당시 부흥부 관리들이 이후 정권에서도 이를 계속 추진해나갔다는 것이다. 참고로 3.15 부정선거 건으로 투옥한 송인상 씨는 1963년에 석방되어 한국경제개발협회장이란 요직을 맡게 된다.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권 때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이 작성되어, 장면 정권에 의해 5개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가, 군사 정권 이후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발전 계승되어 나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업적은 이승만 정권이 여러 분야에서 기반을 잘 다져놓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가 후일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과 2개월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정부가 1년 8개월에 걸쳐 완성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급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의 재난 속에서 국가 존립과 경제 부흥의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의 공적은 마땅히 평가 받아야 한다.

즉, 해방 후 최초의 종합적인 장기 개발계획이라고 할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비록 당초 예정대로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으나, 곧 이어 등장하는 민주당정권에 의하여 일부 내용이 수정되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또 1961년 5월 5.16쿠데타 후 군부정권에 의하여 다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어 비로소 실천에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한국의 경제성장사에 있어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9. 매년 평균 600명 이상을 1인당 6천 달러를 들여 인재들에게 국비유학을 보내서 기회를 주었고, 또1953년~1960년 기간에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나간 유학생이 4,884명, 1953~1961년 기간에 해외로 떠난 단기연수 기술훈련생은 2,309명, 미국을 다녀온 군 장교와 하사관은 1만 명으로 이들 모두 나중에는 공업화와 근대화의 기수가 되어 기여



- 이승만은 AID의 기술원조계획을 이용하여 국내 대학과 해외 많은 대학을 연결하였는데, 특히 700만 달러를 들여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 간에 협정을 맺게 하여 우리 학생이 외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해외 박사 중 미네소타대학 출신이 가장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나중에 한국 과학기술계를 이끄는 중심축이 되었다.

이 밖에도 연세대, 고려대를 워싱턴대학과 협정을 체결하였고, 기술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수많은 대학교 시설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각 기업과 산업체의 많은 기술자를 해외로 장기간 연수를 보내면서 외국의 발달한 기술력을 빨리 배워오도록 장려하였으며, 결국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한국 산업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당시 미국이 10만 kW급의 최신식 화력발전소를 한국과 파키스탄에 동시에 지어줬는데, 한국은 당안리 발전소 완공 이후 곧장 180명 기술력 있는 엔지니어를 투입하여 발전소를 운영한 반면에, 파키스탄은 훈련된 인력이 부족해 운영 인원을 1500명 가량 두었다고 한다.

이렇듯, 만약 이와 같은 이승만의 인재 육성 정책과 교육 정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대학 인력 부족 문제로 산업 근대화 과정에 큰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만약 이승만 시절에 교육 토대가 완성되지 못했다면 박정희 시절 그 찬란한 경제 성장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는 데에 힘을 썼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 회심과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도 나옵니다.

1899년 옥중에서 기독교 귀의

그 와중에 그는 영문 및 한문으로 된 성경을 정독하면서 동료 정치범들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또 감옥을 가끔 심방하는 벙커, 언더우드, 존스 등 북미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동료 죄수 및 옥리(獄吏)들에게 전도를 했다. 그 결과 40여명의 죄수와 옥리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괄목한 만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이 때 이승만의 영향 하에 기독교에 개종한 인물 가운데에는 한성감옥서의 간수장 이중진(李重鎭)과 그의 동생 이중혁(李重爀)을 비롯해 나중에 연동교회, 서울YMCA, 그리고 동경의 한인YMCA 등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는 이상재(李商在),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김린(金麟),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箕), 안국선(安國善) 등 여러 장로가 포함된다. 요컨대, 이승만은 국내에서 기독교에 개종한 최초의 왕족 출신 기독교인으로서 19세기 말 한국에 입국해 전도했던 어느 외국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수의 동포를 기독교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 전도자였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소 안에서 1905년 여름에 저술한 <독립정신>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 진데, 이 교(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고 갈파했다.

즉, 그는 멸망지경에 도달한 대한제국이 부흥해 미국이나 영국 같은 일등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기(國基)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 신앙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한국 백성을 기독교로써 교화(敎化)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기회가 있으면 미국에 건너가 기독교 교육에 관련된 공부를 할 욕심을 품었다. 그는 한성감옥서에서 석방되자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동부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도미(渡美)에 앞서 그는 서울에 있는 북미 선교사 7명으로부터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추천서 19통을 받아냈다.

이승만에게 추천서를 써준 선교사들은 그가 옥중에서 거둔 전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장차 한국의 기독교화 운동에 앞장 설 인물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추천서 덕분에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의 니덤(Needham) 총장으로부터 전액 장학금까지 지급받는 조건으로 3학년에 입학을 허락받았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에서 2년간 공부해 학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하버드대 인문대학원에 입학해 1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프린스턴대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입학, 그곳에서 2년간 국제법, 외교학, 서양사, 철학사 등을 전공한 끝에 1910년 7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은 놀랍게도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들 명문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는 동·서양 교육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4월 8일경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에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승만은 3.1운동의 주도세력이 기독교 교인이라고 믿고 자기는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나라, 즉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셈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건국은 하나님에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6.25전쟁이라는 신사참배에대한 심판을 겪었지만 그 후 1960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정책 하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 제철 건설, 중동에서의 사업, 그 외에도 경공업 등등 놀라운 한강의 기적이라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전쟁때의 신사참배의 회개,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이 나라를 놓고 눈물로 기도하고 1973년 빌리그래함 목사님 서울 방문, 1974년 엑스플로 74대회 등을 포함해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도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 경제성장이라는 놀라운 축복도 함께 주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명언



"물이 마르고 흙탕 되는 도찬 중에 어찌 새 물줄기를 찾지 아니하리오 대한 사람의 새 물줄기는 예수교회라 이 교회가 날로 흥왕함은 더 말할 것 없으려니와 아직까지도 저 불쌍한 사람들을 다 기회를 주어 우리와 같이 생활 샘으로 나오지 못하게 함은 실로 다 우리 신이 부족함이요 사랑이 부족함이라"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잡히나니 이럼으로 교화로서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을 순편하고 순리된 바로다."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입국론


"만약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재주만 키운다면, 이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처럼 세상을 해롭게하는 기운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도 위험할 뿐 아니라 자기에게도 해로운 것이니, 차라리 재주를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

"마음이 잘못된 백성이 주인이 된들, 교육을 받은들, 잘못된 세상을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바로잡을 것인가?"

"세계 문명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회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높은 도덕적 수준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온 세계와 접촉할지라도 참된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신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며, 외교를 위해 아무리 힘써도 돈독한 관관계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소중히 여겨도 서양의 앞선 나라들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도덕적 의무를 존중해도 사회 기풍이 한결같지 않을 것이며, 자유를 소중히 여거도 자유의 한계를 몰라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과 미국처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


김구 선생의 명언



 경찰서 10개보다 교회 1곳 신설이 더 효과적”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나병환자에 대한 생각


 “오, 주님! 이들을 사랑하되 내 부모 형제 처자식들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당한 자들이옵고 부모 형제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그래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



위에는 엑스플로 74대회라는 선교대회 당시 사진과 밑에는 1973년 빌리 그래함 목사님 집회 사진

밑에는 김용의 선교사님이 하시는 다시 복음앞에 집회 사진







6.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나라!



1977년 100억불 수출 달성한 날

포항제철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것도 2년 5개월만에 만들어서 개통했다.

구로공단 근로자 1970년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7. 북한이 자유통일로 문이 열리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국가




통일이 되면은 대한민국은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다시 인도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서 회복하고, 유럽에 영국을 다시 복음으로 회복하는 그러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8. 이스라엘과 함께가는 나라!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그러한 특별한 사명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은 역사도 비슷하고, 샤론의 꽃 무궁화가 국화가 될 정도로 문화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작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많다는 점도 서로 비슷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속에는 언제나 유대인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가는 나라입니다!



한국 근현대사 속의 유대인

남은 유대인들은 백정이나 사당패 혹은 기생 같은 하층민으로 서식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려면 유학중심의 통치사적 정사(正史) 밖에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역사학 방법도 고고학과 인류학 등 학제적 연구로 다양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척박한 사료의 한국사회사와 문화사도 상당히 진척될 수 있다. 최근에도 경주에서 페르시아인 토우(土偶)가 발굴되었고,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인 신라 수도의 국제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문화전승자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조명도 활기를 띠고 있다. 김수로왕과 혼인한 인도 공주 허황옥도 쌍어(雙魚) 문양 등으로 보아 검은 유대인일지도 모른다. 아리랑도 페르시안 집시들의 노래가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유대인 연구는 고대나 중세 얘기에 호기심이 기울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실상 우리 역사에서 진지한 관심을 둬야 할 것은 근현대사에서의 유대인의 도래와 역할에 관해서이다. 광화문의 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 유대인의 동상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구한말 <대한매일신문>을 발간한 베텔(E.T.Bethell,  裵說, 1872-1909)은 영국계 유대인이었다.

이처럼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대인이 한국에 얼마나 왔을까? 그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1628년에 화란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1595-?)가 경주 앞바다에 표류되어 조선에 억류되어 이름을 박연(朴燕)으로 갈고 한국 여성과 결혼해 아들, 딸 하나씩을 낳고 한국에서 죽었다.

이들의 후손이 어떻게 되었을까? 27년 뒤 1653년에 또 다른 화란인 하멜(Hendrik Hamel) 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류해 13년간 조선에 살다가 1666년에 하멜과 7명이 일본으로 탈출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 36명 중 유대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높은데, 그렇다면 그들이 한국에서 죽은 근세의 유대인들이라 하겠다. 이들 중 한국 여성과 결혼한 사람이 있었는지, 그 후손은 어떤지 궁금하다.

쇄국 조선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하려 노력한 최초의 인물은 독일계 유대인 구츨라프(Karl Gutzlaff, 1803-51) 목사였다. 1860년대에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2)는 조선 해안을 탐사하고 돌아가 <금단의 나라 조선>을 저술했고, 1895년 러시아계 유대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 와서 살면서 최초로 구약성서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상해임시정부와 유대인들의 지원

1919년 3·1운동이 좌절되자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이전에 연해주에도 있었으나 유대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국제도시 상하이로 통합했다. 임시정부 건물이 있는 곳은 프랑스 조차지로 유대인들의 게토였다.

그래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유대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컸다. 유대인들도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시오니즘(Zionism)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중이어서 심정적으로 한국인들과 공감하는 바가 컸다. 들여다볼수록 비밀리에 독립운동가들과 유대인들의 접촉이 드러나고 있다.

상하이에 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관심을 갖고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 일행을 파견했다. 그러나 뜻대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지 못하는 사이 본국에서는 3·1만세사건이 터지고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많은 압박이 가해졌다.

여운형과 이광수는 우선 이런 피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 세계 언론에 알리고자 당시 China Press 특파원 자격으로 페퍼(Nathaniel Peffer, 裴斐, 1890-1964)라는 기자를 한국으로 보내 취재하게 했다. 페퍼는 한국에서 캐나다인 스코필드(Frank Schofield) 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자세히 취재하고 많은 사진자료를 갖고 왔다.

상하이의 시오니즘 연합회(Shanghai Zionist Association)를 창립하는 데 유대인 법률가 로빙기어(Charles Lobingier)가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후일 한국이 해방되고 미군정이 실시될 때 미군정 법률고문으로 한국에 와서 살았다.

유대계 체코인 마사리크(Thomas Masaryk), 가이다(Radola Gajda), 한취(Josef Hanc) 같은 인사들이 이끄는 체코 임시정부단(Czechoslovak Legion)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도와줬다.

후일 대통령까지 된 마사리크는 1918년 러시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를 횡단해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가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고 이승만과도 교섭했다. 독일에서는 한국인 작가 이미륵(1899-1950)이 유대인 출신 후버(Kurt Huber) 교수와 특별한 교분을 가졌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정부 수립까지 3년간 실시된 미군정기는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한국에 살기 시작한 때이다. 물론 일본이나 상하이 같이 큰 무리로 몰려올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동양의 경험이 있거나 특별한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은 자원해 한국에 와서 살았다.

미군정의 총책임자인 하지(John Hodge, 1893-1963) 장군이 유대인이었고, 법률고문들은 대부분 유대인 출신이었다. 로빙기어(Charles Lobingier, 1866-1956) 외에 페르글러(Charles Pergler, 1882-1954)는 체코의 독립운동사에 오르는 인물이다.

프랭켈(Ernst Fraenkel, 1898-1975)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법을 배우고 미군정 법률고문으로 내한해 활동하면서 서울법대에서 국제법을 강의하기도 했다.

일본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 있으면서 일본의 법개혁에 참여한, 예컨대 오플러(Alfred Oppler), 케이드(Charles Kades) 같은 유대인 법률가들도 한국을 방문하거나 주한 동료들과 교섭을 했다.

6·25 전쟁과 유대인

한국전쟁에 많은 미군과 유엔군이 참가하면서 한국 땅에 유대인의 숫자는 급증했다. 어떤 학자는 한국전쟁에 3만 명의 유대인이 참가했다고 한다. 로젠(Milton Rosen, 1906-76)은 군종 랍비로서 한국전의 실황을 생생히 뉴욕의 유대인신문(Jewish Chronicle)에 10회 연재했다.

후일 그의 아들이 편집해 <한국의 미국인 랍비>(An American Rabbi in Korea)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작가로 유명한  포톡(Haim Potok, 1929-2002) 역시 군종 랍비로서 한국전을 체험하고 <나는 한줌의 흙>(I am the Clay) 등 소설을 남겼다. 이른바 GI유대인(GI Jews)은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테마이다.

1962년 이스라엘과 외교관계가 개통되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키부츠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유태영 등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러 이스라엘에 유학했다. 1964년 서울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1969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한국 대사관이 설립되었다.

1978년 이스라엘의 모셰 다얀 정부는 예산 절감으로 서울의 대사관을 철수하고, 주일본대사를 겸임하게 했다. 이 때(1985-88)의 대사 코엔(Jaacov Cohen) 박사는 한국에 대한 연구가로서 수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현재 히브리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 대사관이 설치되고 국제적으로 이름 있는 유대인 사업가들의 연락사무소가 생겨나고 이스라엘 기업인들이 한국의 기간산업에 참여했다. 아이젠버그(Shaul Eisenberg, 1921-77)는 독일 뮌헨 출신으로 일본에서 일본 부인을 얻어 미국으로부터 철강을 수입, 성공해 한일회담 후 한국에도 진출해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불행하게 북경에서 죽었다.

프리덴탈(Richard Friedentahl, 1896-1979)은 영국에 사는 유대인으로 괴테 전기가로 유명한데, 1957년 일본에서의 국제펜클럽대회에 독일 측 부회장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미륵 박사의 가족을 만나고 돌아가 방한기를 남겼다.

아미르(N.A. Amir)라는 이스라엘인이 우리나라 노동청의 고문관으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근무했다. 3년 반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이론으로보다도 산업의 현장을 다니면서 안전에 관한 현장 지도를 많이 해줬다.

  




9. 학교도 자기가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


대한민국은 학교도 일반학교, 특수학교, 그리고 대안학교, 인문계 학교, 만화, 요리 등등 포함한 각 분야에 전문 고등학교  등등 여러 종류에 학교가 있습니다. 그 학교 중에서 자기에게 적성이 맞고 원하는 학교를 언제든지 선택해서 다닐 수 있습니다.


10. 건설기술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나라!




대한민국은 위에 나오는 아시아 최대의 국제공항 중 하나인 인천국제공항 그리고 밑에 서해대교, 맨 밑에 인천대교 등등 큰 다리도 많을 정도로 만큼 세계에서도 대한민국에 토목 건설기술을 알아주는 나라입니다!



11. 아시아 최대의 상륙함을 가지고 있는 나라!





이 사진들은 전부 다 독도함 사진입니다.



독도함은 길이 199m, 격실(방) 700여개, 높이 17층 빌딩 수준에 이른다. 승강기도 7대나 되고, 최대 19?의 항공기나 화물을 운반할 수 있는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는 물론 승조원이 타는 소형 엘리베이터도 있다. 헬기 등 항공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견인 차량과 각종 상륙장비, 탄약 및 화물을 옮기는 지게차도 있다.

식당은 승조원과 상륙부대원을 합쳐 1000여명이 모두 1시간 내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규모다. 취사장에는 250인분의 밥을 1시간 안에 지을 수 있는 9개의 대형 가마솥과 대형 살균기, 대용량 식기세척기, 얼음 및 아이스크림 제조기 등이 있다. 식당 한구석엔 전자오락 게임기 4대도 설치돼 있다. 장병 체력단련실, 24시간 운영되는 빨래방, 의류 멸균기 1대 등을 갖추고 있다.


수송 능력[편집]

독도함의 수송 능력은 헬리콥터 7대, 전차 6대, 상륙돌격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LSF-2 고속상륙정 2척, 승조원 300명, 상륙군 700여명을 동시에 수송할 수있다. 독도함은 2척의 고속상륙정 LSF-2 (솔개 631)등을 탑재한다. 독도함의 격납고 아래에 있는 함미부에는 배 밑바닥이 없어 바로 바다가 들어와 있는 길이 26.4미터, 폭 14.3미터의 작은 풀장이 있다. 이 풀장으로 공기부양정이 들락거리는 ‘배 안의 항구’인데, 이 항구를 도크(dock)라고 한다. 독도함 안에는 전차, 트럭, 장갑차등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지하 주차장이 있다. ‘덤프(dump)’ 또는 ‘비클 스페이스(vehicle space)’라고 불리는 이 주차장은 배 안의 항구에 연결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정말로 보니 대한민국은 정말로 대한민국은 헤븐 대한민국입니다! 헬조선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나라이며! 마지막 때에 통일한국을 통해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해서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나라!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가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헤븐 대한민국입니다!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주만 사랑합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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