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 임종덕 하우스보이가 ~ 하나님이 함께한 요셉 같은 기적의 인생 드라마 ~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6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옆 목조 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잠시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문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 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때 미군을 만났다.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기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 129명 고아들을 살리기 위해 임종덕은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들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듸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 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할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겠금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 학업을 계속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한편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 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금(2011년)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인 임동선 목사다.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 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 뼜衙�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 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세워 가며 단어를 외었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바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더 불타 올랐다. 1957년 하바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테마를 주제로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제가 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즉,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 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 주었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였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데로 몇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속에 던겼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날 장교 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 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 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도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혔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 군으로 인정할려는 것이다.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 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데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목숨이었다.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데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달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공인줄 알고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도 부상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뛰었다.그 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 통화가 되었다.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 했잖아요”…임종덕은 1주일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드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을 받은 임종덕 임종덕은 키가 팔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 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 �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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