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온 국민이 알아야할 불편한 진실

주님의 일꾼 2024. 2. 22. 16:42

495.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에 크나큰 비극중 하나는 역사왜곡이다보니 영웅이 매국노로 폄하되고, 역적이 영웅으로 둔갑하고 있다.

사실무근한 소문에 휩쓸려 부하뇌동하는것은 결코 지성인이 아닌바 지성인이라면 역사적 사실과 모함을 구분하는 혜안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관련 불편한 진실을 소개드린다.

■ 불편한 진실

1. 이승만은 과연 독재자였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평가할때는 오늘날 잣대가 아닌 당시 시대적 상황을 최우선 고려해야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오늘날 대한민국 자유민주를 이룬것에 기여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일성은 독재를 지향했지만 이승만은 자유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건국을 이루었다

오늘날 남북간 국력이 58 : 1로 크게 차이가 난 시발점은 바로 남북한 건국이념, 

즉 자유민주 : 독재체제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둘째, 이승만은 과거의 중국중심의 대륙외교노선을 미국ㆍ일본등 해양외교노선으로 전
환하여 선진부국들과 정치 및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셋째, 북한은 3대세습이지만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심지어 6.25 전쟁
중인 1952년에도 대통령 직접선거를 하였다.

넷째, 이승만은 의무교육을 강조하여 80% 문맹률을 20%로 낮추어 민주주의 발전에 필수적인 국민지식수준을 높였다.

다섯째, 1948년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유럽 선진국인 프랑스, 스위스보다 앞섰다는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다.

* 참고(부산정치파동)

이승만 재임간 1962년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의 의원내각제간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당시 관제대모와 야당의원 연행등 불미스런 일도 발생하였다.

그러나 안보적 측면에서 당시 전쟁중이라는 백척간두의 안보위기를 고려시 의원내각제보다는 위기관리에 적합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한다.

게다가 오늘날까지 대통령 중심제가 유지된 것도 남북분단의 현실에서는 대통령 중심제가 적합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중 도망갔는가?

도망이란 아슈라프 가니 아프칸 대통령과 같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갖고 전쟁지휘를 포기한체 다른 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계신 경무대는 6월 26일 북괴군 야포가 미아리에 도착하여 적 포병사정거리내에 들어가게되어 매우 위험한 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계속 경무대에 머물러 적에게 포로가 되거나 살해되면

과연 누가 전쟁지휘를 하겠는가? 

이승만 대통령이 적에게 체포되면 정부기능이 마비되고 국군은 패전감에 휩쓸리며 민심동요는 크게 흔들려 UN군 마져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적 포병사정거리를 벗어나 보다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비서들의 간곡한 권유로 6월 27일 새벽 3시경 경무대에서 부득이 남쪽으로 지휘소를 이동시켰는바 이는 도망이 아니라 전쟁 지휘를 계속하기위한 조치였다.

따라서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시민들과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도망갔다고 하는것은 매우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김일성은 자기 집무실에 라디오를 켜놓은 상태에서 국군이 평양에 도착한 10월17일보다 5일 빠른 10월 12일 압록강 건너 중국땅으로 도망갔으며 자기아들 김정일을 일찌기 멀리 중국 심양으로 대피시켰다.

3.이승만은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시민들을 죽였는가?

한강철교와 인도교 폭파는 1950년 6월 28일 오전 7시에 폭파예정인데 당일 새벽 2시 30분
에 조기에 폭파되었지만  적부대(3사단, 4사단 및 105 땅크사단)의 한강도하를 4일간 저지
시켰다.

반면 한강이북에 국군 1사단등 많은 부대들은 수많은 장비와 탄약등을 버리고 한강이남으
로 철수해야했다.

따라서 한강철교와 인도교 폭파는 군사작전상 부득이 폭파한것이지 서울 시민들을 죽이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정부는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통제하였고 한강인도교 폭파에 대비하여 인도교 주변에 부교를 설치하여 시민들이 한강이남으로 통행을 지원했다.

당시 한강철교와 인도교 폭파로인해 군경 77명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나 민간인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참고

표현의 자유란 거짓말까지 허용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 정치가 저질인것도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 모리배들이 많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똑같은 거짓말이라도 세번 반복하면 진실로 받아드린다고 하는데 세계에서 IQ가
제일높은 우리 국민들은 더이상 거짓에 속는 일이 없길 바란다.

4. 이승만은 엄청난 비자금을 축적했는가?

이승만 재산은 단지 이화장 저택 하나뿐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이후 이화장에서 식량사정과 난방에도 매우 어려움이 많했던 것으로 안다.

이승만이 생활한  하와이 사택은 필리핀 마르코스 저택에 비해 너무 초라하였고 하와이 사택은 마치 1960년대 시골 빈촌에 곧 무너져가는 초가집같이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교민들 도움으로 어렵게 생활하신것이 하와이 교민들의 증언으로 입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이승만 부부 생계를 도운분에게 내가 가진 총재산은 이화장
하나이니 이화장을 주겠다고 하였다.

5.이승만은 장기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를 방조했는가?

이승만은 당시 대선에서 야당 대선후보 조병옥 박사의 사망으로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상태였다.

3.15 부정선거란 부통령 이기붕과 장면간 경쟁인데 이기붕이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전혀 몰랐기때문에 경무대 인근에 학생시위진압 경찰 총소리를 듣고 저게 무슨소리냐고 되물었다.

따라서 이기붕의 부정선거는 이승만과 무관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억울해도 책임을 지고 깨끗이 하야하셨다.

6. 이승만 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혹자는 이승만 대통렁을 친일파로 매도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ㆍ일본 내막기

이승만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이 미국을 침공할 것이라는 '일본 내막기'를 1941년 6월에 출간한후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침공하였다.

이승만은 친일파가 아니기때문에  일본내막기를 출간하였고 미국에 대해 일본의 침공으로 일본이 패하면 우리나라는 독립할 수 있다는 한가닥의 희망을 갖은 것이다.

ㆍ내각임명

북한 김일성은 친일파라도 김일성에 충성하면 내각으로 기용했지만 이승만 내각에는 친일파가 없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한민당은 친일협력인사로 결성된 정당이라는 국민적 비판이 많아 한민당의 권력분점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내각임명에도 한민당 출신은 1명만 기용하자 한민당은 정치적 반대세력으로 전환하였다.

ㆍ평화선

이승만이 전쟁중에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영토로 하였고, 또한 한국전쟁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겨냥하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 참고(친일파 처리)

일제시대때 근무한 공무원ㆍ경찰ㆍ 군인등 모두를 친일파로 분류하는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일제시대때 근무한 공무원을 친일파로 처벌하면 당장 우리정부의 행정기능유지가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군인과 경찰은 당시 극심한 내부혼란과 북한의 각종평창주의로 인한 심각한 안보상황에 대비해야하기때문에 이들을 친일파로 처벌하는것도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신중치 못한 친일파 처리는 심각하게 분열된 국민들을 또 다시 분열시킬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1945년 해방직후에는 친일파 청산보다는 안보위기를 극복하고 국민결속력이 더 중요했다고 본다.

7. 이승만과 미국은 38선을 분단 고착시켰는가?

혹자는 1945년 해방후 38선 분단ㆍ고착은 이승만과 미국에 있다고 하나 분명 사실과 다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아 강대국들은 결코 이를 외면할 수 없는 지역이다.

38선은 역사적으로 1894년과 1903년 각각  중·일, 러·일간에 한반도 분할문제를 두고 열린 비밀회담에서 이미 거론된 적도 있었다. 

굳이 38선 분단고착의 책임을 묻는다면 소련의 책임이 가장 크다.

1945년 8.15 해방직후 38선은 단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담당하는 한시적인 책임선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38선 이북지역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악용하여 38선을 영구 고착화시켰으며 이와관련된 주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 적군은 북한지역 일본군 무장해제를 한다는 미명하에 만주를 거쳐 북한지역으로 신속히 남하하였다.

* 소련은 과거 동유럽을 소련위성국으로 만들 때도 소련군이 주둔하에 친소괴뢰정부를 세웠다. 

따라서 북한지역에 소련적군을 대규모 투입시킨것은 북한지역 공산화를 위한 고도의 계산된 전략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소련은 1945년 9월부터 북한지역 공산화를 서둘어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정부구성)를 조직하여 사실상 공산화하였다.

* 이념적으로 소련에 의해 북한을 공산체제로 전환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영구분단을 고착시켰다.

셋째, 소련 스탈린 사주로 3년 2개월간 한국전쟁으로인해 다시 38선 분할은 민족분단선으로 고착되었다.

굳이 미국에 책임을 있다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일본군을 과대평가하여 소련에게 대일전 참전요구를 하였는데 이게 소련군의 북한 지역에 진주명분을 준것이다.

반면 당시 소련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견제가 없었더라면 한반도는 소련 적군에 의해 공산사회주의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 참고(독일통일 교훈)

나치독일은 제 2차대전에 패전하자 미국ㆍ소련등 연합국 4개국에 의해 분할되고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그러나  NATO 회원국인 서독은 미국의 도움으로 1990년 독일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도 80여년전에 발생한 38선 분단관련 책임공방보다는 한미군사동맹을 이용하여 38선 분단장벽을 극복하여 통일한국을 달성해야 할 것이다.

8.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갔는가?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이 아니라 잠시 출장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출장시 휴
대한 짐은 조그만한 가방등 보따리 4개였다.

이승만 부부의 하와이 출장을 망명으로 둔갑시킨것은  건국과 구국의 영웅 이승만의 업적
을 지워버리고 단지 3.15 부정선거로 실패한 지도자로 낙인시키기위한 음흉한 정치적 계
산임을 배제할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에서 조기귀국을 꿈에도 바랬지만  국내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끝내 귀국지 못하고 하와이에서 서거하셨다.

■ 맺음말

1.이승만 대통령은 신(神)이 아닌이상 약간의 정치적 오류와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다.

2. 이승만은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1945년 해방직후 절망적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여 건국을 하고, 3년 1개월이라는 6.25전쟁에서 기적적인 한미상호조약체결등을 이루어 내셨다.

3.월남 공산화 직전 주월 미대사인 맥스웰 테일러(한국전쟁시 미 8군 사령관)는 월남에 이승만 대통령같은 분이 계셨더라면 월남은 공산화되지 않았을거라는 아쉼을 표했다.

4.우리 모두 이승만은 무려 39년간 미국생활을 하셨지만 미국국적을 거부한 나머지 오로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끝

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육사 31)박사

2024년 2월 14일

PS : 필자는 2006년 예편후부터는 매년 년초 동작동 현충원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참배해왔다. 

앞으로도 거동이 가능하는한 년초에는 동작동 현충원을 찾을것이다

카톡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