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수도 이전이 관습헌법에 비추어 위헌으로 판결이 났듯이 오래된 우리의 '관습신앙'도 성문헌법과 같은 성경에 근거하면 위헌이며 위선이다. 헌재에서 위헌이라고 판결나면 아무것도 아니듯 하나님 앞에서 '위헌신앙'이라고 판결이 나면 우리의 오래된 관습신앙은 아무것도 아닌(무효)것이 된다. 참 신앙은 생명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의 공동체이어야 한다.
예수 생명의 조건은 반드시 운동하고 역사하여야 한다. 우리 가슴에 담은 신앙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오랜 종교적 관습이나 전통적인 의식으로 치장할 것이 아니라 펄펄 끓는 생명과 역동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명의 힘이란 실로 위대하고 신기하다. 하수구속에 작은 생명의 씨앗이 날아와서 싹이 트는 것을 보았는가? 집채만 한 바위 밑에 눌려서도 생명의 싹을 틔워 거침없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본적이 있는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찬 서리가 내리는 겨울 산꼭대기에서도 소나무가 사철나무 되어 올곧게 그리고 싱싱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을 보았는가?
이것이 로마정부도 어찌할 수 없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독교적 야성이며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몸 찢고 피흘려주셨던 것은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었다. 풍성한 생명을 위함이었다. '예수 생명'을 풍성하게 소유하면 세상도 우리를 감당치 못하며 허리가 꺾이고 형벌 같은 고난들이 겹겹이 에워싼다해도 우리의 신앙을 항상 반듯하고 싱싱하게 유지할 수 있다. 생명을 소유한 믿음은 '얼마나 안 넘어지냐'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다시 일어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계란 중에는 무정란과 유정란이 있다. 무정란은 어미가 아무리 오랫동안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유정란은 어미닭이 23일간만 품으면 반드시 병아리가 생명을 가지고 나온다.
성도들도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유정란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이다. 무정란 같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고난이 닥치고 손해가 나고 풍랑이 일어나면 그냥 도망가거나 무너지거나 슬쩍 사라진다. 그러나 유정란 같은 성도들은 고난이 올수록, 풍랑이 셀수록, 더욱 주님 품으로 파고들어 마침내 생명을 출산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잉태하여서 믿음의 작품을 출산하는 것을 말한다.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은 오래 품는 것과는 무관하다. 다만 생명력과 연관이 있을 뿐이다. 신앙의 경력과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기에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아무런 작품도 출산하지 못하는 무정란 같은 성도가 있고 교회 다닌 지 불과 23일밖에 안되었어도 수많은 믿음의 작품들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유정란과 같은 성도가 있게 마련이다. 생명의 신비란 참으로 대단하다. 더러운 곳에서도 자라고 위험한 곳에서도 버티고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상의 꽃을 피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성도는 예수생명을 충만히 소유한 예수나라의 전사이다.
현대전에서는 특수부대에 의해 승패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마귀와의 영적전투에서도 나약한 병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어있고 권능 있는 전사가 필요하다. 영적전사(=특수정예요원)의 숫자가 전쟁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사는 예수생명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전사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손해 볼 각오도 되어있어야 한다.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를 위해 내 기득권도 즉각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생활에 얽매이거나 과거를 돌아보아서도 안 되며 혈연관계에 묶여도 안 된다. 언제든지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께서 부르시면 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은 밀알 되어 썩고 그곳에 주님만이 사셔야 한다. 아랍권에서는 '지하드'라는 조직이 있다. 소위 '자살특공대'이다.
알라를 위하여 성전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다. 지하드에 선발되는 경쟁률이 50:1이라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지하드 선발에 탈락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엉엉 울고 간다고 한다. 선발되지 못한 서운함이 눈물의 이유이다.
만일에 오늘날 우리나라 성도들 중에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지하드(?)를 선발한다면, 몇 대일의 경쟁률을 보일까? 혹시 미달되지는 않을까? 오 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 영향력이 없는 이유는 죽으려고 예수를 믿지 않고 살려고 믿기 때문이며, 버리려고 믿지 않고 소유하려고 믿고, 섬기려고 믿지 않고 섬김 받으려고 믿고, 베풀려고 믿지 않고 얻으려고 믿고, 포기하려고 믿지 않고 더 많이 차지하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이제 예수 때문에 손해 본 흔적이 필요하다. 예수 때문에 고통당한 흔적이 필요하다. 또 예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인내한 흔적이 필요하다. 예수 때문에 버림받고 핍박받은 경험들이 필요하다. 죽은 큰 통나무는 흐르는 물에도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송사리는 엄청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나는 관습신앙으로 위장한 나약하고 비겁한 병사인가? 아님 예수생명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의 전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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