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대한민국이 이 지경으로 망가진 이유(퍼온글, 명문장 추전)

주님의 일꾼 2025. 10. 18. 01:38

우리나라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를 돌아보려면,

먼저 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대체 국가란건 왜 만들어진 걸까?

왜 저들은 당연한듯이 세금을 걷어가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는 걸까.

사람들은 긴 세월을 살면서도,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해, 전혀 고민해보지 않는다.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사람들이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사를 통해, 현재의 쾌락과 욕구를 참는 대신 지금의 땀방울을 미래로 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의 발전이란 바로 여기서 시작했다.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사는 인간들에 의해서,

모든 인간 문명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내가 소중히 땅을 일구고 수확물을 만들어도, 그걸 승냥이떼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낼름 훔쳐가는 인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기생충의 등장이었다.

인간은 이때부터 두종류로 나뉘어졌다.

미래를 사는 사람, 만드는 사람, 자연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사람, 생산자와,

현재만 사는 사람, 부수는 사람,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사람, 즉 기생충으로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연보호라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다.

인간은 절대 자신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보호하려면, 자신의 편라험울 위한 에너지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충당하는 수밖에는 없다.

자연을 보호할수록, 기생충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사람들은 기생충으로부터 자신의 수확물을 지키려했지만,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그 당시에 자산권이란건 없었다.

땅의 주인이란 개념자체가 없는 시기에, 땅은 그저 먼저 선점하고, 힘있는자의 것이었다.

상대가 나보다 세다면, 속절없이 뺏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인류는 서로 집단을 형성하여 자산권이란 개념을 만들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공책에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하는 것처럼,

석판에다가 그림을 그리고 저땅은 철수땅, 저땅은 영희땅,

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종이에 불과한 자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정부, 군인, 정치인이란걸 만들어냈다.

그들은 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근본적인 속성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권한을 부여받은 보안회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통제받지 않는 권한은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사기를 쳤다.

개인이 사랑해야하는건, 국가 그 자체다.

국가란 자신의 이웃을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심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이런 개인의 사랑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그 방향을 국가가 아닌 정부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마치 옛 통치자들이 개인의 신에 대한 신앙심을 중간에서 가로챈것처럼,

정치인들이 자신을 신격화하고, 우상화시키는건, 악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결과다.

그 결과, 개인이 힘써 일군 자산들은 점점 정부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정부는 생산을 하지 않는 기생충이기 때문에, 모든 자산이 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가면 국가가 멸망하는,

마치 꽃이 피고지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자연의 순환이 생겨났다.

이런 당연한 역사적 흐름을, 평범한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늙을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자신들이 쫓는 것들이 다 무가치해지고, 나이를 먹으면 새로운 욕망이 자라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학생은 자유를 원하고,

청년은 돈과 이성을 원하고,

노년은 건강과 사람을 원하고,

죽음앞에서 신의 구원을 원한다는 사실을, 그자리에 서야만 비로소 이해한다.

짧은 100년 인생조차 그럴진데, 수백년이나 되는 국가의 노화를 일개 개인이 깨닫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국가가 어느정도 나이를 먹었는지 알려면, 자산권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를 보면 어느정도 가늠을 할 수가 있다.

자산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깟 부동산, 그깟 땅, 그런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내가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해서 얻은 가치있는 것들을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국가가 번창하고 쇠락하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저, 봉건시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2000만명의 가난한 국민밖에 없던 나라였다.

그때로부터 70년이 지난 지금,

절반은 풍요속에, 절반은 절대적 빈곤속에 던져져 있다.

이 차이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바로 자산권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인의 진정한 의무에 충실했다.

땀을 흘리는 국민들, 즉 생산을 하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수고로움을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줬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저장수단인 땅을,

정권이, 정치인이 소유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나눠줬다.

아무리 열심히해봤자, 자신의 수고로움을 저장할 그릇이 없다면, 국가는 발전할 수 없다.

한국전쟁중에, 공산당들의 선전선동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온국민이 지킬 자산이 있는 지주였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위에 붙어있는 저 나라는, 나라의 가치저장수단을 모두 한명이 독점해버렸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산을 모을 수 없으므로,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되었다.

땅으로 번 에너지는, 지주인 국가가 모두 먹어치웠다.

개인은 법으로 묶여, 국가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그들이 가진 화폐는, 인플레로 녹여 국가가 환수해갔다.

결과는 수십년이 지난지금, 너무나 명백하게 우리 눈앞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근원은 어디서 나왔을까?

사람들은 재건축 재개발에서 그깟 일조권 하나를 가지고 수십년을 싸우는데,

자기가 가질 수도 있었던 수많은 자산권을 포기할 수 있는 헌신적인 사랑은 어디서 나온걸까.

그건 바로 그가 가진 기독교 신앙이었다.

사람들은 신앙과 정치 경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려 하지만,

신앙과 종교없이는 정치도, 경제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맞딱뜨린다.

신은 존재하는가,

그 대답에 따라 인생의 모든게 바뀐다.

이승만이 조선의 한성감옥안에서 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감옥안에서 조용히 스러졌을 것이다.

그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미국의 많은 신앙인들의 후원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5000만 국민의 삶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신앙심은 그에게 민족에 대한 사랑을 줬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해 지상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줬다.

한국이야말로 진정으로 미국의 제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청교도 신앙위에 나라를 건설했기에 가능했다.

그에게 공산주의와의 타협따윈 존재할 수 없었다.

개인의 재산권을 독점하려는자와, 개인의 재산권을 돌려주려는 자 사이에서 타협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건국된 대한민국은, 드디어 높게 발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처음 건국되던 시절, 대부분의 국민들은 생산자였다.

흔히 건국세대라고 불리는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기생충보다는 생산하는자에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원래 태어날때부터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태어나자 마자 가장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것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공짜로 누린다면, 그건 누군가의 땀방울이다.

수십년을 살면서도 쉽게 깨달을 수 없는 진리를, 온 국민이 채득할 수 있었다.

거기에 국가가 준 쉽게 훼손되지 않는 그릇,

땅이라는 가치저장수단은,

그런 그들의 노력과 맞물려 폭팔적인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들은 때론 단순무식하고, 고집스럽고, 예의가 없고, 꾸미지 않았지만,

성실했고, 조직에 순응할줄 알았고, 자손을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겐, 자산과 신앙이 있었다.

어떤 악한 정치인이 들어서도, 그들은 그들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땅, 즉 자산권과,

거짓에 속지 않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이 있었기에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라엔 생산하는자들보다 기생충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시간이 지남에 따른 어쩔수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본래 모든 물질 세계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기 때문에, 뛰어난자들은 더 많은 자산을 소유하기 시작했고,

굳건했던 신앙심도 옛 유럽과 미국이 그랬듯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점점 미래보단 현재를 바라보는 사회가 되었고,

길거리에서 전도를 하는 자들도 사라진채, 교회는 그저 신앙이 아닌 종교의 일부로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신앙이 사라지자, 가진자들은 더이상 나누지 않게 되었고,

가지지 못한자들은 목적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세계의 성공이 전부이기 때문에,

가진자들은 집, 차, 그림, 혹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챙기기 위한 과시용 기부에 집착했고,

가지지 못한자들은 자신의 무너진 자존감과 고통을 받아줄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순간, 불행한자들에게 항상 찾아오는 악한이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60세 이하 세대들, 그들은 봄에 태어났다.

그들에게 풍요는 날때부터 공기처럼 당연한 것들이었다.

집앞에 마트가 있고, 당연한듯이 공부를 할 수 있고,

물을틀면 따뜻한 물이 나오고, 언제든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고,

당연한 듯이 바닥에 깔려 있는 보도블럭들이,

누군가의 목숨값이라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피로 은혜를 받았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사는 아파트가 많은 노동자의 죽음위에 지어져있음을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그들은 건설사가 안전비용을 올릴수록, 노동자들의 사망율이 떨어질수록, 아파트값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부모들이 과거를 희생하여 현재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떄문에 자신들이 즐기는 모든것들이, 현재를 위하여 미래를 희생하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윗세대가, 태어난 순간부터 전쟁터에 서있었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들의 안전하고 풍족한 유년기가, 그저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라고 부모로부터 주어진 황금같은 기회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를 받았지만,

대신 감사할줄 아는 마음을 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국가는 당연히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범죄는 일어나선 안되며, 자신들이 해외에 놀러가서 마주치는 빈곤과 가난이 자신들의 일이 될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때부터 기생충이 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기생충은 단순히 물질적 부의 생산량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회에 기여하는바보다 가져가는게 더 많은 자들은, 기생충이 된다.

나라에 숙주보다 기생충이 많아지는 순간, 나라의 파멸은 그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생산하는자들은,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기생충들은, 문제를 외부에서 찾는다.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분노와 불행을 외부에서 찾아 해맨다.

젊을을 탕진하고 일에 치인 노처녀가 자신을 책임질 남편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젊은시절,

지금의 고통을 만회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절대적 누군가, 정부를 찾아 해맨다.

하지만 정부는 생산하지 않는자, 기생충의 편이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를 숨기는데만 급급하게 되어있다.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생산성의 향상과 전혀 상관없이,

그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더 나아지기만을 원한다.

선한 정부는 그런 현실은 불가능하다며, 이들을 가르치려들지만,

기생충들은 그런 정부 따위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선한 정부는 점점 선택받지 못하고, 문제를 숨길줄 아는 악한 정부만이 남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사회적 변화들은, 정부가 치열하게 문제를 숨겨놓은 흔적들이다.

지방의 노동력이 떨어지자, 외국의 노동력을 가져온다.

외국으로 자본 유출이 심해지자, 부동산 부양을 통해 자본 유출을 막는다.

시장에 돈이 돌지 않으면, 빚을 내서 뿌린다.

결국 모든 문제는 생산의 문제,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자원의 부족에서 생기기 떄문에,

해결책은

자원을 더 벌어오거나,

사람들의 욕망이 줄어들거나(감사할줄 알거나),

빚을 내고 자원을 얻어오는 방법밖에 없는데,

당연히 정부는 쉬운 길, 부유한자들의 세금을 늘리거나, 빚을 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빚과 세금은 건실하게 생산하는 자들의 의욕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점점 기생충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문제는 점점 곪기 시작하며,

마치 진짜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평생을 싸우는 부부처럼,

사회엔 불만과 갈등만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가서는 진정으로 악한 정부,

개인의 자산을 소유하려는 자가 나타난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에 목줄을 채워 그에게 가져다 바친다.

그는 자신의 자산을 늘려간다.

자산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자의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와도, 어머니가 돈을 관리한다면, 돈은 어머니의 것이다.

세상의 돈은 대부분 남자가 벌지만, 백화점은 대부분 여성의 편의를 위해 물건을 배치한다.

물건을 파는 자들은 실제로 돈이 누구를 위해 쓰여지는지를 알고 있기 떄문이다.

악한 정부는 이 미묘한 차이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다.

불법적인 행위에 바지사장을 앉혀놓는것처럼,

그들은 소유하기보다는, 통제하기를 원한다.

악한 정부는 점점 법의 갯수를 늘려나간다.

아이가 죽었다.

아이를 위해 법을 만들자.

소방관이 과로로 죽었다.

소방관들을 위해 자신이 통제 가능한 공무원들을 늘리자.

노동자가 죽었다.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기업을 통제하는 법을 만들자.

아파트값이 올랐다.

서민들을 위해 아파트 가격을 통제하자.

너무 파악하기 쉽지만, 기생충들은 이 단순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악한 자들, 사기꾼들의 행동원리는 단순하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디를 가던 이간질을 하는 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남의 불화와 불행을 통해, 상황을 통제하는 걸 즐긴다.

선한 자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길 바라지만,

악한 자들은 남의 불행을 통해 자신이 구원자가 되길 바란다.

구원자가 되기 위한 필수요건은, 불행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악한 정치인들은 개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생산수단인 땅, 자본, 노동력을 가지길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재건축 따위를 좋아할리가 없다.

재건축이란건, 땅의 주인이 늘어난다는 얘기고,

지킬 자산이 있는 땅주인은 기생충이 되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 재초환, 임대주택이 나오는건 필연적인 일이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생산기지인 가정이 평화롭길 바라지 않는다.

평화로운 가정에서 그들은 아무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혼이 지옥이고, 모두가 이혼숙려하며, 모든 금쪽이들이 정신과에 다니길 원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연출한다.

또한 그들은 신앙이 번성하길 원하지 않는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생산성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고,

따라서 기독교이야말로 그들의 가장 큰 적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생산하며,

댓가없이 이웃과 나누며,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회에 평안을 퍼뜨리는 자들은,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존재의의를 말살시키는 악과 같다.

이승만이라는 고작 단 한명의 기독교인이 5000만의 인구를 악에서 건져냈다는건,

그들에게는 5000만의 노예를 뺏겼다는 말과 같다.

그가 지어놓은 대한민국이라는 견고한 교회를 무너뜨리기까지, 무려 7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승만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본래 사기란건, 결국 남의 것을 뺏어가는게 목적이기 떄문에,

시대에 따라 이름만 바뀔뿐, 본질이 바뀌진 않는다.

폰지, 보이스피싱, 국민연금, 로또청약,

왕정,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유가 없는민주주의,

다들 이름만 바뀔뿐, 악인들이 같은 인간을 착취하고,

자산권을 뺏어가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떄문에 그들은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매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며, 대상에 이름을 붙이는데 매우 집착한다.

사람들은 단어를 통해 세상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따뜻한 어감의 단어는, 사람들의 정신적 장벽을 느슨하게하고,

적들에게는 부정적인 단어를 붙임으로써, 적들의 이미지를 고착화시킨다.

민식이법, 행복주택, 노란봉투법, 독박육아, 골드미스, 극단적'선택', 욜로, 웰빙, 시민단체, 내란수괴, 무속정치, 기름장어, 효순이법, '제주항공'참사......

알게 모르게 머리에 박혀, 사람들의 인식을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이러한 사기를 당하지 않는 자들,

깨어있는 자들은 아무리 좋은 말로 유혹해도, 말의 어감이 아닌, 결과에 집중한다.

하지만 기생충들,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자들은,

이런 수법에 쉽게 넘어가고 선동된다.

80년대 이후로 기생충의 증가는,

대한민국을 사기공화국으로 만들었다.

처벌받는 사기꾼은 삼류고,

처벌받지 않는 사기꾼이야말로 일류다.

사기의 피해자들, 기생충들은, 자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부를 착취당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가치관은 지속적인 선전선동으로 병들고 뒤틀렸으나, 자신들이 병자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게, 온순한 양들같은 기생충속에서,

정부는 끈임없이 복지를 늘리고 재정을 늘려 화폐인플레로 개인의 저축, 연금, 보험을 강탈해가고,

자신들이 부채질한 부동산 양극화로 가진자들을 소수로 만들고,

가난한자들은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렴해진 빌라와 오피스텔을 세금으로 사들여 국가의 자산을 늘려나갔다.

또한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목에 채워지는 목줄인줄도 모른채,

각종 아이들 이름으로 도배된 수벡가지 법을 지지하고,

결국 행동 하나하나를 국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나라로 만들어가고 있음에도,

이제야 점점 안전하고 이상적인 국가가 되간다는 환상에 젖어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동산이 오른다고 환호하지만,

부동산이 양극화된다는건, 생산자들이 소수가 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소수는, 민주주의 정치인의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된다.

결국 현재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경제적 문제도 아니다.

그저 역사의 많은 나라가 그랬듯이, 늙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암세포가 수십년동안 자라나듯이,

기생충이 늘어나는건, 어떤 사회던지간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의 죽음도 한낱 인간의 손으로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는 죽음을 받아들이더라도,

그안의 세포 하나하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몸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뭘까?

나는 해답없는 문제제기를 싫어한다.

세상은 어차피 정반합이며, 생명과 죽음의 전쟁터고,

생산자와 기생충은 영원히 싸울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서로 자기편을 늘리려 싸우는 것이야말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정치라는 이름의 전쟁이며,

생산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혹은 더 오래 연명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생산자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생산자는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답은 우리나라가 수십년전에 그러했듯이,

올바른 신앙속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일찍이 대한민국의 구원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바로 신앙으로부터 나온것이기 떄문이다.

우리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과 종교, 정치와 사회는 모두 한몸처럼 이어져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신앙을 전달해야 한다.

그건 상대방을 내가 아는 지식을 통해 계몽시키는게 아니다.

위에서 가르치듯 전달하는 계몽이 아니라,

아래부터 섬기는 신앙의 전달이 필요하다.

정치적 투쟁도, 제정적 지원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마음속 빈자리를 메꿀수는 없다.

오직 유물론과 사회주의라는 종교를 대신할 신의 존재만이,

저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

늙은 노인이 다시 젊어지는 기적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생산자들은, 남의 탓을 하지 않는다.

저들을 미워할 시간에,

저들을 변화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 시작은.

내가 별볼일 없는 죄인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내가 저들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는 것이 나의 덕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것.

나도 저들과 같은 시험에 들었을 때,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뺨을 맞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