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나눔

그리스도인은 왜 고통을당해야 하는가?

주님의 일꾼 2008. 9. 20. 22:47

월요일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하셨나요 ? 가정생활도 그렇지만 회사생활에서 우리는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난 속에 매몰된다면 삶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알고 슬기롭게 대처한다면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며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 아래의 글이 무거운 저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 같아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예수안에서 영원이 승리하는 형제 자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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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왜 고통을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종종“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한 후부터 우리에게는 고난이 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택한 종들의 삶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들은“자기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제자도의 원리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려면 먼저 고난을 당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왜 고난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들이 있다. 그중 몇 가지 이유가 욥기에 나온다.

 

 

욥기에 나타난 고난의 이유

욥이 여러 가지 면에서 극심한 고난과 고통에 빠졌을 때 그를 찾아온 세 친구는 그의 고난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주장했다(욥 4-25장). 물론 죄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욥의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가 순결하게 단련되도록 하기 위함라고 젊은 사람 엘리후가 주장했다(욥 32-37장).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태워서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상이 성경에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롬 5:3,4 ; 약 1:2-4), 이것도 욥이 고난을 받는 1차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욥기의 처음 두 장에 따르면, 욥의 고난은 어둠의 세력과 빛의 세력 사이의 싸움의 일부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육신적 복들을 모두 잃어버려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실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사탄에게 그를 치도록 허락하셨다. 사탄은 욥을 쳤지만 욥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신실한 관계는 이 세상의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사탄과 세상의

눈앞에서 증명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볼 때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분을 향한 우리의 성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려고 애쓰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다가, 실제 고난을 당하면 극심한 절망감에 빠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보다 더 강한 것이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다.

고난보다 더 강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고난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준다. 고난보다 더 강한 것은 바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또 다른 이유는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나온다. 거기서 바울은“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의 말 속에는, 복음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난이 불가피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이런 의미의 고난을 기꺼이 당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고 말했다. 우리의 고난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인도의 한 힌두교 마을에서 한 가족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 그들의 회심 직후에 그 가족의 아이가 심하게 아팠다. 이것을 보고 힌두교를 믿는 이웃 사람들은 그 가족이 종교를 바꾸었기 때문에 신들이 그들을 저주했다고 말했다. 그 가족이 아이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지만, 그 애는 결국 죽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애의 장례식을 계기로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음을 거부하던 자세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

 

한편 어두움의 세력이 빛의 세력을 미워하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기도 한다.이 미움은 종종 ‘박해’라는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바울은“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한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줄 수 있다. 예수님은 사탄이 심지어 우리의 몸을 죽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사탄이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신다(마 10:28).

 

악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충실하면 그분은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이 진리를 배운 사람은 요셉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 악한 일을 당하여 큰 고난을 당했지만 여러 해가

지났을 때 이 진리를 배웠다(창 50:20). 이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박해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이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쓸쓸한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고 말했다.

 

하나님은 고난이 우리를 주 예수님과 연합하도록 만드는 신비로운 방법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허락하기도 하신다.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고 한다고 말했다(빌 3:10). 이사야는 예수님에 대하여“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고 말했다. 그분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고난당할 때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다고 한다. 그분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에게“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고 물으셨다.사울이 교회를 괴롭게 했을 때,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고통을 준 것이었다. 고난 속에서 나누는 교제는 다른 어떤 경우에 나누는 교제보다 더 강하고 깊은 법이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들 중 하나는 깊은 신앙적 체험이 없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맛볼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불필요한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살아가면서 고난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놀라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 고난을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은 실제 고난이 찾아오면

절망하거나 그것을 피하기 위해 불순종의 길을 걷기도 한다. 야고보는 시련이 선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시련을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1:2-4).

 

고난을 통과할 때 우리는 낙심하여 쓰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의 교훈을 명심하자. 그는 고난이“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기 때문에

그것은“잠시 받는 경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고후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