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전 대통령의 45주기 추도식이 19일 서울 현충원에서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사)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회장 강영훈), 유족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도식은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신앙세계’ 발행인인 최재분 장로의 기도, 장로찬양단 코랄카리스의 특송, 이 전 대통령의 육성 방송, 분향 및 유족인 이인수 박사의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날 추도식에선 민선 5기 재선에 성공한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이 전 대통령을 향한 추도사를 낭독해 눈길을 끌었다. 김 지사는 그간 이 전 대통령에게 대한 존경심을 표해 왔던 터.
이와 관련, 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은 이날 <데일리안>과의 통화에서 “우리가 김 지사에게 추도사를 낭독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김 지사는 좌파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전향하신 분으로, 누구보다 대한민국의 보수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 지사는 추도사에서 “존경하는 이 대통령님! 당신께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건국하셨고, 6.25 공산침략으로부터 이 나라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셨으며, 조선왕조라는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국민주권국가를 건설하려다 사형선고를 받고 6년을 복역하셨고, 6.25 전쟁 중임에도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를 지켜내셨다”고 이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렸다.
김 지사는 이어 “이미 100년 전에 자유가 근본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고 역설하셨다”면서 “민주주의를 해본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당신께서 앞장 서 세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야 말로 진정 탁월한 선택이었고 국민의 뜻에 따라 권좌에서 물러나는 결단을 내리시어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했다.
운동권 출신인 김 지사는 특히 “저는 당신을 몰랐다”고 고백한 후 “우리 국민들도 당신을 모르고 있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나라를 세운 대통령을 국민들이 모르고 있다. 당신은 지금 무관심과 망각의 무덤 속에서 외롭게 묻혀 계신다”며 “이제 서야 저는 당신을 희미하게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신께서 세운 이 나라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성공한 나라가 됐지만,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하고 끝까지 방해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가장 실패한 나라가 됐다”면서 “당신의 업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저 어두운 실패로 인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신은 이 나라 근현대사의 중심에 계시고 우리 역사의 걸출한 지도자임에도 이 나라 곳곳에 그렇게 많은 동상을 세우면서 반만년 역사에 가장 빛나는 대한민국을 세우신 당신의 동상 하나 세우지 못했으며, 기념관조차 없다”며 “우리의 무지와 비겁함을 저부터 깊이 반성한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위대한 선각자인 당신의 동상을 세워서 모든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선각자요, 선구자인 당신의 삶을 배우겠다. 당신의 옥고와 고난의 길, 쓸쓸한 망명의 교훈도 배우겠다. 위대한 건국과 이 나라를 지킨 희생적인 리더십도 배우겠다”면서 “당신의 높은 뜻을 받들어 저희들은 반드시 선진 일류 통일국가를 이룩하고, 자유와 민주주의가 활짝 핀 부강하고 정의로운 나라, 문화와 복지강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 전 대통령은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해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돼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또한 협성회보가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서 계속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이 전 대통령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전단을 배포했다가 이로 인해 징역 7년형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이 때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 을 저술했다. ‘독립정신’ 에선 국제간의 외교와 외국인과의 친선의 필요성,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국권 존중과 자유권을 소중히 할 것을 주장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 전 대통령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이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이 전 대통령의 공훈을 기려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데일리안 = 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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