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나눔

포도나무 비유 (요 15:1-8)

주님의 일꾼 2018. 10. 4. 14:50


 
구약시대 메시야 선지자로 불리는 이사야는 「포도원의 노래」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교훈하였습니다. 이사야 5:1-2에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고 하였습니다. 7절에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였습니다(1절).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도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의도하시는 메시야 사역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가운데 강조하는 바는 나무와 가지의 관계로서 이는 예수님과 우리 성도들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개되는 지상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와 그의 자녀 되는 성도들의 사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I. 기독교 복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하늘의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천체라든지(계 1:16, 22:16), 또는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동물로도 표현하였습니다(사 53:7). 어떤 경우에는 나무와 꽃으로 비유하였고, 감람나무, 무화과나무처럼 과목으로도 묘사하였습니다.
그 중에도 포도나무의 경우는 구약과 신약에 구분 없이 여러 방면으로 쓰여졌는데 이는 기독교 복음의 특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날 제자들과 함께 가지신 최후의 만찬 상에서 떡과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둘러앉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포도주 잔을 돌리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6:27-28). 고린도전서 11:25에는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잔”은 포도주를 뜻하는 것으로 이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4에 보면 여리고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예수님의 피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치유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이사야 5:7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세상 모든 족속가운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편 80:8에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을 유월절과 피 뿌리는 절기를 통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다음 그곳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정착케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약적으로 볼 때 우리를 죄악 세상에서 구별하여 자기 교회의 회원으로 삼아 주신 것에 비유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 대하여 바울은 예수님은 몸이요 우리는 지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엡 4:16).
주님께서는 피로 사신 자기 교회와 성도들을 아끼시고 보호하십니다. 시편 80:14-15에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포도나무의 열매는 성도가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상징입니다(슥 8:12). 시편 128:3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시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성도의 가정에 내려주시는 축복의 열매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포도나무 또는 탐스럽게 영글어 있는 포도송이의 그 향기와 열매를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신령한 복과 육신의 복으로 묘사합니다. 잠언 3:9-10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밧단아람으로 떠나는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이삭은 아들에게 입 맞추며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창 27:28).

 

 Ⅱ. 교회운동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는 나무와 가지가 연합하여 몸을 자라게 하는 것에 특징을 두었습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유기체로서 교회는 여러 가지 성향의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연합되어 있는 것과 그것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불가분리의 원칙을 가집니다. 마치 포도나무가 땅 속에 있는 뿌리에서부터 줄기와 가지로 이어지고, 거기서 무성한 잎과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여기서 이상적인 교회의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교회운동의 점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주도하시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겨자씨로 비유하였습니다.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진 후 점점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게 된다는 것입니다(마 13:32). 곧 작게 시작해서 크게 자라고 많은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 교회운동의 특징입니다.
또 씨뿌리는 비유가운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통하여 전개하시는 하나님나라 운동은 거창하게 시작해서 흐지부지 하게 끝나는 세상나라의 일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욥 8:7).
또한 그 일에는 농사짓는 것처럼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가꾸고 자라는 단계와, 열매를 맺고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단계가 있습니다.


(2) 교회운동의 영속성입니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가지와 나무가 서로 나쥐어 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점입니다. 동시에 싹이 나고 눈이 틀 때부터 자라는 과정과 꽃피고 열매 맺고 결실하여 거두기까지 그 모든 과정에 모든 지체가 제 기능과 역할을 같이 해 나간다는 점입니다.
땅 속에 있는 뿌리에서부터 나무의 몸체와 줄기, 그리고 가지와 잎과 열매에 이르기까지 각기 그 붙어 있는 위치와 수행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라도 무시되거나 건너뛰어 넘어갈 수 없습니다. 시간과 환경에 맞추어 조화롭게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교회운동 역시 초기에 기초를 놓고 뿌리를 다지며 착실하게 가꾸어서 크게 성장하고 부흥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많이 성장하고 부흥하게 되는 것도 뿌리 깊은 역사의 연륜에 따르는 결과임을 말해 줍니다.


(3) 교회운동의 신비성입니다.


1절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였습니다. 포도원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농부의 심정은 어떻게든지 탐스럽고 충실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농부의 희망을 이루게 하는 데는 나무와 가지가 연합된 가운데 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곧 땅속에 박혀 있는 뿌리에서 수분과 진액을 빨아올리고 그것이 줄기를 통하여 모든 가지에 골고루 배분하여야 합니다.
한편 잎사귀는 햇빛과 공기를 받으며 탄소동화 작용으로 필요한 영양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외부의 힘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자체에서 그침 없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생명작용인 것입니다.
교회운동도 그냥 볼 때는 사람이나 건물이나 조직이나 재정이나 정책과 같은 외적 요건에 따라서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정상적으로 가동되게 하는 주체는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스가랴 4:6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4) 교회운동의 효율성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반드시 금년에 순이 난 가지에 열리게 됩니다. 땅 속 깊은데서 자양분을 빨아올리는 나무의 뿌리나, 그것을 성실하게 가지로 공급해 주는 나무의 줄기나, 비바람과 폭염에 시달리면서도 영양을 공급해 준 나무의 잎사귀는 포도송이를 만져 보지도 못하고 오직 가지만이 그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평도 원망도 없이 자기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탐스러운 열매의 기쁨을 잎이나 줄기나 뿌리가 모두 가지와 함께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에 대한 공로를 탐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역할과 희생을 감내함으로써 모두가 다 같이 기쁨을 누리게 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요 3;29-30).

 

 Ⅲ. 교회운동의 복스러운 결과입니다.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만물이 다 선하고 아름답지만 그 중에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며 하나님의 목적에 쓰임 받는 것일수록 축복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참 포도나무라 불리는 하나님의 교회도 세상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관이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축복의 대상입니다.

 

(1)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때문입니다.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가 부흥되고 자기 백성이 복을 받아서 풍요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심고 가꾸어 열매를 맺게 하는 농사의 일도 따지고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즐거움이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목적을 성취하게 하며 나아가서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게 일하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6-7).


(2) 성도에게 기쁨과 축복이 됩니다.

주님의 교회는 거기 소속된 모든 회원들이 주님의 뜻에 따라 다 같이 열심히 일하고 활동하면서 거기에서 오는 결과를 보고 기뻐하며 즐기게 됩니다. 요한복음 4:35-37에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처럼 주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그 결과에 즐거움과 보람을 가지는 자입니다. 시편 126:5-6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 생산적인 교회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에서나 생산적인 능력을 행사합니다. 보통 사람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 같은 열매를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이사야 54:1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펼쳐질 신약교회의 환상을 피력한 것입니다.
교회의 생산적인 특징은 교회의 본질인 생명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근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의 샘이 흘러나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47:1-12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 나온 물이 점차 시내가 되고 큰 강물이 되어 그 흐르는 유역의 마른 땅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 사막이 옥토로 바뀌고 초목이 우거지며 동물들이 서식하는 낙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루어 놓는 생명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환상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디든지 들어가고 어떤 대상이든지 그 속에 생명적인 변화를 이루어 놓습니다. 이는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간 누룩과 같아서(마13:33), 소리도 없고 동작도 없이 모든 부분을 변화시키며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예술, 무엇이든지 새롭게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