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축복

[스크랩] (펌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재업)

주님의 일꾼 2017. 5. 12. 17:56

* 박근혜 탄핵사태로 한국교회 안에 불기 시작한  6개월 간의 정치적 광풍이 이제 19대 대통령으로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그 끝을 보이는 것 같다.    외국의 어느 사회 학자는 '정치과잉'이라는 말로 한국사회를 비판한 적이 있다.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까지는 좋지만, 이것이 지나쳐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당과 후보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현상을 보며 '정치과잉 사회'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 과잉의 현상'은 이 땅의 삶이 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입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지라 선거철만 되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곤 한다. 


본 블로거는 그 동안 이번 대선을 맞아 누가 대통령이 되던 그리스도인들은 지나친 기대나, 지나친 실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홍준표 문재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긴 안목에서 살펴본다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세우신 분도 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이번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롬 13:1)하신 말씀처럼 한국교회는 이제 새롭게 당선된 대통령이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안보적 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 


혹여 그가 박근혜 전대통령처럼 하나님과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고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필요하다면 나단 선지자와 같이 책망하는 말로 도와야 한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태에서 본 것처럼 한 국가 지도자의 불행은 곧 국민들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박근혜 탄핵과 대선 과정에서 일부 기독교 카페와 한국교회가 보여준 '정치과잉'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쓴 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를 재업한 것이다.  싫든 좋든 문재인 대통령 시대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정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으신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가이사에게(로마에)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지를 질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마 22:17).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하면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이 로마를 위해 부역하는 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만일 세를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 하면,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자라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이렇듯 사악한 의도로 질문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 22:18)라고 책망하시며,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보이라 하시더니 저들에게 “이 형상과 글이 뉘 것이냐”(20)라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가이사의 것이니이다”(21)라고 대답하는 저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는 대답을 하셨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그 대답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갔다(22)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기에 이 대답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한 마디 반론도 못하고 예수님을 떠난 것일까? 

 

이 말씀은 우선적으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가이사로 상징되는 세상 권력과 하나님 모두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책무와 함께,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도 주어진 책임(의무)을 다해야 한다.

 

두 번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라 하신 이 말씀은 또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또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대표적인 권세가 바로 국가와 교회이다. 국가는 가이사로 상징되는 세속적인 권세를 대표하고, 교회는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영적 권세를 대표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국가와 교회라고 하는 두 권세는 서로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며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건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어느 한 편이 일방적으로 다른 편에 복속되어 부역하거나 혹은 서로 야합하는 경우가 생겨나곤 하는데, 이로 인해 국가와 교회 모두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간혹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위임받은 사람들이 가이사의 권세를 탐내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권세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당을 만들어 세상 권세를 탐내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이들이 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거역하고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이들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영적권세를 가이사에게 바쳐 스스로 권력에 부역하려는 자들도 있다.  간혹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권세를 위임받은 교회 혹은 기독교 단체가 일방적으로 특정한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여기에 올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교회가 특정한 정치 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한다면 저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어떻게 저들의 죄를 책망하고 바로잡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하신다. 교회가 세상의 권세를 탐해도 안 되지만, 교회가 특정한 정치세력에 올인하여 저들의 부역자가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광야에서 헤롯왕의 잘못을 책망했던 세례요한과 같이(막 6:18) 교회는 세속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을 하나님께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여기에서 멈춰져야 한다.




 

 


- 예레미야 -

출처 : 묵시[REVELATION]
글쓴이 : 전사 미카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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